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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국립공원에는95

r김영환장군 공적비 이곳은 해인사 일주문을 향한 탐방로를 가다보면 성철스님 사리탑 가기전 오른편에 보면 가로로 세워진 사각형의 비석을 볼수있다. * 이 김영환 공적비는 1951년 6.25 전쟁 당시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에 적군들이 숨어 있느것을 알면서도 명령에 불복하고 해인사 안에 숨어있는 적군들에게 폭탄을 투하 하지 않았다. 이는 해인사를 지키기 위함 이었으며 2002년에 해인사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공적비를 세웠다. 2016. 2. 15.
자운대율사사리탑(慈雲大律師 舍利塔) 자운대율사(1911~1992)스님에 대하여 2013년 3월27일자 불교신문에 실린기사 내용 입니다.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율사인 자운(慈雲, 1911~1992.사진)스님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는 세미나가 열린다. 자운대율사 탄신100주년 기념사업회(대표 세민스님, 원로의원)는 오는 4월12일 오전10시부터 오후5시까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기념세미나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날 세미나는 원로의원 인환스님이 ‘문수보살과 자운대율사’라는 주제의 기조발표로 시작된다. 이어 모두 6가지 소주제의 발표가 계속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율풍 진작을 통한 한국불교 중흥의 행적(법혜스님, 전 동국대 교수) △대승보살계 홍포와 무생계첩의 재흥(허흥식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유교법회 정신의 계승.. 2016. 2. 14.
영암대종사.사리탑.행적비 아래 표지석에는 영암대종사(1907~1987) 께서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과 동국대 이사장 그리고 동국대 역경 원장을 맡은바 있으시며 월정사.통도사.봉은사.해인사 등지에서 한평생 종단 교학과 함께 조계종 행정의 기틀을 마련 하셨으며 그.현대 불교사의 큰 업적을 남기시고 무소유의 청빈한 삶을 사셨다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 이 사리탑은 성철스님 사리탑아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2016. 2. 14.
혜암대종사 사리탑(慧菴大宗師 舍利塔) 헤암 대종사(1920~2001) 사리탑은 성철스님 사리탑 아래 좌측에 모셔져 있습니다. 2016. 2. 14.
퇴옹당 성철대종사 사리탑 성철스님(1912~1993)은 해인총림의 방장과 대한불교 조계종의 6대.7대 종정을 역임하며 올곧은 수행 정진과 중생을 향한 자비의 실현 서릿발 같은 사자후로 근.현대 한국 불교사에 큰 영향을 끼치었다. 성철 스님의 사리를 모신 이 사리탑은 통도사 적멸보궁을 기본형으로 하여 우리나라 전통 부도의 아름다움을 현대적 조형 언어로 새롭게 해석 한 것이다. 가운데 구는 완전한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상징하고 살짝 등을 맞대고 있는 반구는 활짝핀 연꽃을 표현하며 크기가 다른 정사각형의 삼단 기단은 계.정.해 삼학과 수행 과정을 의미한다. 사리탑을 둘러싸고 있는 참배대는 앞쪽에서 뒤쪽으로 가면서 서서히 높아졌다가 낮아지는데 이것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시간의 무한성을 상징한다. 1998년 성철 스님의 열반 5주기.. 2016. 2. 14.
해인사비림(海印寺碑林)Stupas of Haeinsa Putriarchs 해인사 입구 일주문 가기전 오른쪽 비석거리에는 해인사 사적비를 비롯한 20 여기의 공덕비가 안치된 비석거리가 있고 뒷편 언덕에는 자운(1911~1992).성철(1912~1993).혜암(1920~2001).일타(1929~1999)스님의 행적비와 사리탑을 모셔놓은 부도전이 있습니다. 2016. 2. 14.
석 조(石槽) 석조는 사찰에서 물을 담아 두거나 곡물을 씻는데 쓰였던 일종의 돌 그릇으로 해인사 석조는구광루 진입하기전 좌측 범종각 옆에 놓여 있는데 근래에는 아무것도 담겨져 있지 않네요. * 우리나라에서 현재 남아있는 석조중 가장 큰 석조는 충남 서산 보원사지에 남아있는 보물 102호로 지정된 보원사지 석조로 물을 약 4톤가량 담을수 있다고 합니다. 2016. 2. 14.
합천반야사지 원경왕사비(陜川般若寺址 元景王師碑)보물128호 이 비석은 고려시대의 고승 원경왕사(1045~1114)를 기리고자 인종3년(1425)에 세운 비다.가야면 야천리 반야사 터에 있던것을 1961년 해인사 경내로 옮겨왔다. 거북받침돌.비몸.지붕돌을 갖추었고 각 부분이 얇은것이 특징이며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1년(1104)에 승통이 되엇다. 예종때 왕사가 된후 귀법사에 머물다 예종14년(1119)에 70세로 입적하자 왕은 원경 시호 내려줌. 이 비는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탑동 마을에서 1968년 현 위치로 옮겨 왔고 비의높이 2.3m. 너비1.2m. 재료는 화강석으로 비문은 김부일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가 썼다. * 고려인종3년(1125)에 만들어진 이비는 조각 기법이나 간단한 형태의 지붕들 등에서 고려 중기 특.. 2016. 2. 13.
해인사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지주幢竿支柱는 한자로 기 당幢, 깃대 간竿이라하여 사찰의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높 이 달아 이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으며 또한 그 위치가 산문을 들어서기 전, 일주문 옆에 있어 안에 있는 도량의 신성을 알리는 상징구조물이기도 했다.천년 고찰 해인사의 당간지주는 일주문 바로 옆에 세워져있는 것으로 조성연대를 정확히 알 수없 으나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기단 부위가 심하게 마모되고 자연 풍화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천년 역사만큼이나 긴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특히 해인사는 그 이름이 바다 해海, 도장 인印이라 하여 광활한 바다에 마음 속에 심상心象을 남기는 도량이라는 창건주 스님들의 정신이 담겨있는 사찰로서 이는 불퇴출의 용맹심으로 깨달음을향해 나아가는 위대한 탐험의 배, 곧 구.. 2016. 2. 13.
영지(影池)Pond of Reflection 해인사 일주문 들어 가기전 오른편 계곡을 막아놓은 조그만 연못을 볼수있다. 이곳은 대가야국의 김수로왕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후와 혼례하여 많은 자손을 두었는데 그중 일곱 왕자가 허황후의 오빠인 장유 화상의 수행력에 감화되어 처음 입산수도하게 된 곳이 이곳 가야산 칠불봉(2433m) 이다. 자식을 출가시킨 허황후는 아들들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수 차례 찿아와 만나자고 했으나 만 날 수 없자 일곱 왕자가 수도하고 있는 봉우리가 그림자져 비치는 이 연못에서 그림자만을 보고 그리움을 달랬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그림자못" 이라고 하여 영지(影池)라 불리게 되었다(출처:여래기획제작 가야산해인사) 2016. 2. 13.
가야산 사찰(청량사淸凉寺)) 천년고찰 청량사는 그 창건연대가 확실하지 않지만 신라말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857~?)이 이곳에서 놀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한동안 폐사가 되었던 것을 1811년에 회은(晦隱)스님이 중수하였고 최근에 이르러 경암(景庵)스님이 다시 중건 하였는데 지금 또다시 큰 불사를 일으켜 새로이 단장 하고있다. 신라때의 고찰인 청량사는 보물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으로 보이는 여래좌상과 삼층석탑.석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 매화산 기슭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의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 최치원조에 이 절은 최치원(857~?)이 즐겨 찾던 곳이라.. 2016. 2. 12.
가야산암자(금강굴.金剛庵) 금강굴은 보현암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6년에 불필(不必)스님이 창건한 비구니 수행처이다. 금강보전과 백송 2016. 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