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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유적지를 찿아(천주교)

갈매못 성지(충남.보령)

by 애지리 2015. 1. 12.

無名殉敎者 피로 물든 處刑場—.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375-2
갈매 못 聖地는, 자연환경에서 천주교 성지 가운데 산자수려한 해안에 존재하는 성지다. 경관이 수려해 한 해 5만 명의 순례자와 관광객이 방문한다.

갈매 못은 1866년 3월 30일 성금요일의 병인박해 때에 군문효수를 당한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 위앵 민 마르티노 신부, 오메크로 오 베드로 신부와 황석두 루카 회장, 그리고 장주기 요셉 회장, 그리고 수많은 무명 순교자의 피로 물든 처형장이다.

이 자리를 처형장으로 택한 것은 대원군이 명성황후의 국혼이 예정된 시기로 서울로부터 200리 이상 먼 곳에서 형을 집행해야 후환이 없으리라는 무당의 예언 탓이었다.

게다가 러시아와 프랑스 함대가 침략을 시도한 서해의 외연도가 까마득히 바라다보이기 때문이라는 일화도 전해진다.

인근 오천성은 좌수영과 우수영 등, 영향력 컸던 충청수영이 있던 곳으로 다른 지방과 차별된—, 각지의 죄인들이 여기서 처형당했다. 치명 터로 확인된 1927년부터 이곳이 성지로 관리됐고, 1975년 순교비가, 그리고 1999년 경당이 완공됐다.


충남도 지정 문화재로 등록—.


전래적으로 무서운 곳으로 알려져 마을 사람들이 누구도 이 근처에 가지 않도록 해왔던 이곳은 길도 없어 인근 오천성에서 배를 타고 와야 했다. 지금은 성지로 개발돼 경당 앞 천수만변 도로에 순례 단체가 줄을 잇는다.

단체 순례자들은 언제나 편리한 시간에 미사봉헌을 예약할 수 있다. 매주 일요일 11시 30분에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서해의 섬들과 천수만이 바라다보이는 이곳은 순교 성인들의 피를 연상시키는 듯, 낙조가 의미심장하다.

충남 보령시는 천주교 성지 가운데 유일하게 바닷가에 있는 오천면 영보리 ‘보령 갈매못 천주교 순교지’가 2013년 2월 12일 충남도 기념물 188호 지정 문화재로 등록됐다.

갈매못이라는 이름은 마을 뒷산이 목마른 물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형’이라 하여 갈마연동으로 일컬어졌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풍광이 뛰어나 해마다 관광객 5만명이 순교지를 찾고 있다.

갈매못 성지 오명관(베네딕토) 신부는 “갈매못 성지가 충남도 문화재로 지정돼 역사·문화·종교의 통합적인 교의의 현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주변의 역사·문화 자원과 연계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군 통제사의 '갈매기 연못'—.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375-2 오천(鰲川)…. "鰲"는 자라 "오", 또는 큰 바다거북이 '오'(본래글자는鰲)에 내 '천'자의 이름이다. 오천 면소재지는 원래 조선왕 11대 중종 5년(1510년)에 축조한 고소성(姑蘇城)의 소성리(蘇城理).

성지가 있는 곳의 행정구역을 통폐합을 하기 전에는 갈마연동(葛馬淵洞)으로 '갈마연'(葛馬淵)은 '갈매기'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말뜻과는 상관없이 음만 비슷한 취음으로 돼 있다.'갈매못'(葛馬淵)은 '갈매기 연못'이라는 뜻….

오천은 치안과 국방 담당 수영이 있었고 수군통제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 갈매못이 순교지가 된 이유는 오천면에 속하는 외연도와 관련해 있다. 외연도(外烟島)(烟-연기)는 황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846년 6월에 불란서 해군제독인 세실 함장이 세척의 군함을 끌고 서울 한강으로 진입하려다가 한강을 찾지 못해 외연도에 정박했다.

당시 헌종에게 1839년(기해박해)에 불란서 선교사, 앵베르 범 주교, 모방·샤스땅 신부 등 3명의 불란서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묻는 편지만 상자에 남겨놓고 돌아간 적이 있다.

이와 같은 세실 함장의 조선 영해 침입사건을 계기로 당시 옥중에 있던 김대건 신부의 처형이 앞당겨졌다.


외연도 향해 목을 쳐서 처형—


1866년 3월30일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들을 내친다는 의미에서 세실함장이 침범했던 외연도에서 이웃 오천수영에 안 다블뤼 주교, 오 오메트로, 민 위앵 신부, 교우 황석두와 장주기 등 5인을 연행해 처형했다.

병인양요 때 불란서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했지만, 조선군은 이를 물리치고 나서 불란서군이 진출한 양화진 절두산에서 1866년 10월 수천 명 신자를 목베어 죽인 것과 같은 이유로 이곳이 서양인 처형장소 선정과 유관하다.

김대건 신부가 서품 후 배로 입국하려다가 먼저 도착한 곳이 제주도 용수. 그때 당시 신부였던 다블뤼 주교도 함께 들어왔다.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했다.….

그 후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사목하다 순교했다. 다블뤼 안 주교는 서울로 압송돼 심문을 당했다.

다블뤼 안 주교 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이 서울을 떠나 수영에 도착한 때는 성주간이었으며 참수를 당한 순교일은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순교했다.

문제의 갈매 못 순교현장은 1925년 당시 公州 본당 최말구 신부와 槐山군 높은 다랑이 주임 윤 바오로 신부와 답사에 나선 정레오(규량)신부 (당시 扶餘군 금사리 쇠양리 본당 주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발견됐다.


1925년 갈매 못 순교장 발견—.


1866년3월 30일 위의 다섯 분의 시체를 몰래 발굴해 홍산 지방 석죽골로 이장까지 한 이 바오로와 그 조부 이 바오로 중백부 지수, 부친
힐라리오가 정 신부님 공소에 사는 것을 발견하였다.

장깃대 섰던 자리, 참수하던 자리, 그리고 임시 매장한 세 곳을 확인하는데 고증을 해준 편응택, 이조용 그리고 김순경 등, 셋이 은밀히 홍산 땅 석죽골로 이장한 장본인들 네 분의 말과 일치함을 정레오 신부가 확정했다.

장상길이 지주인 그 장소가 밭이 돼 있는데 장깃대 섰던 자리라고 허사익주사(1975년 현재 55세)와 그 아들(면서기)이 입증했다.위치는 오천면 영보리 갈마연진 터가 있던 곳 전(田) 353번지로 3각형 밭의 면적은 20여평이었다. 이 20여평 안에서 109년전 비극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레오 신부님은 부랴부랴 서둘러서 1926년 9월 14일 자기 명의로 그 20평을 10원(일화로)에 사들여 등기까지 완료해 두었다가 1929년 1월 서울 천주교 재단법인에 기증했다.

오기선 신부님의 "곡예사 같은 인생"(171면 이하)에 정규량(레오 1883 - 1953) 신부님께서 이곳 갈매 못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성에서 보령시(대천)로 가는 21번 국도를 따라 광천읍을 지나면 주포면 소재지 보령리에 닿는다. 여기서 6km를 달리다 삼거리에서 좌회전. 6km의 해안도로를 달리면 길 왼쪽에 갈매못 성지가 있다.

 

 

 

순교 기념관

 

승리의 성모성당 지붕모습

기념관 입구 우측 성 황석두 루까상

기념관 입구 좌측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상

성 모자상

십자고상

 

승리의 성모성당

 

 

 

승리의 성모성당 안

제대의 붉은 십자가 다섯분은 103위 성인중 갈매못 성지에서 순교하신 다섯분의 모습을 상징하고

노랑과 주황은 예수님을 따르는 희망의 빛을 뜻한다고 합니다.

 

 

 

 

 

 

 

 

 승리의 성모성당 가는길

 

 

 

 

 

 

 

 

 

 

 

 

 

 

 

 

 

 

 

 

 

 

 기념관앞 야외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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