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성주애지리문화농원2410 성산관(星山館)성주읍 임진왜란 으로 관아(官衙)의 건물이 전소 되었는데 10년 뒤인 1608년(선조41년) 송영구(宋英耉)가 현재의 성주초등학교 자리 에서 수리하고 관아 동쪽에 있는 사시헌(四時軒 군수관사)을 짓고 1657년(효종8년) 최계훈(崔繼勳) 목사가 동헌(東軒)을 현재의 군청 자리로 옮기고 관사인 사시헌도 동헌의 남쪽으로 옮겼다 그뒤 1700년(숙종26년) 이만성 목사.1735년(영조12년)경에 이성제(李誠蹄)목사도 관아를 수리 하였고 1871년(고종8년) 조운긍(趙雲兢)목사는 고을의 백성 들로부터 재물을 모아 공사비를 충당 하였다. 1906년 (고종광무10년) 지방행정 구역변경으로 목사가 없어지고 성주군 으로 구역이 줄어 들었고 성산관과 절제아문 2현판도 떼어 따로 보관 하였다. 성산관은 정면5칸.측면3칸의 동양 .. 2011. 2. 17. 월회당(月會堂) 성주.벽진 이 건물은 조선조 1516년(중종11년)에 원정 여선생(圓亭 呂先生)이 남전향약(藍田鄕約) 강회소(講會所)로 강당(講堂)으로 사용되었으며 원정 여 선생은(1481~1553) 휘(諱)는 희림(希臨)이요 자(字)는 대지(大之) 호(號)가 원정(圓亭)으로 37세때 중종왕자 복성군(福城君) 사부(師傅)가 되었고 선생 께서 본당 이름을 월회라고 지은것은 월일강회(月一講會)라는 넉자 말에서 따온것으로 뜻은 한달에 한번씩 이라도 모여서 향약강회를 가져야 한다는 훈계조로 만든 이름이고 누구나 참석할수 있었다고 한다. 조 정암(趙 靜菴)이 이 일을 알고 임금께 주청해서 1517년(중종12년)에 전국 팔도에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 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여씨향약 이란 주자(朱子)가 남전향약을 보고 남전향약에 더 보태.. 2011. 2. 16. 성주댐 수몰전 마지막모습 경북.성주군.금수면.봉두리 에 성주댐이 생기면서 봉두리 주민들은 실향민 으로 전락되어 지금은 이곳 저곳에서 살아가고 있을겁니다. 이렇게 명절이 다가오면 여기를 떠났던 봉두리 사람들은 오손도손 정겹게 살았던 아련한 추억을 그리워하며 물속에 잠겨버린 옛동네 옛집 생각에 잠기리라 짐작 되네요. 제 주변에 거기 살았던 사람들 좀 있답니다. 그분들 한테 아래 사진들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으면 하네요. 왼쪽 스레트지붕 큰 건물은 금수농협창고 이고 오른쪽 흰 슬라브 건물은 봉두초등학교 교실건물과 관사 숙직실 입니다.(1990년 여름) 앞쪽 기와지붕 건물은 금수양조장 이었고 오른쪽 흰벽 건물은 금수농협 사무실 건물 입니다.(1990년 여름) 성주댐 물막이 공사중 폭우로 둑이 유실되고 있는 중입니다.(1990년 여름) 2011. 2. 2. 기쁘고.즐거운 설날 되십시요?? 명절은 즐겁고 삶에 있어서 어느날보다 많은 의미를 가진 날이라 해도 부정 할 사람은 별로 없을것 같은데 나이를 먹어 가면서 명절의 가치 기준도 변화되고 환경과 생활방식도 많이도 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은 부모님 가족이 있는 고향을 찿는 효 의 근본은 살아 있음이 명절마다 민족의 대 이동을 보면서 느껴봅니다. 이젠 가는 세월이 안타깝고 숨막히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위해 몸부림 칠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명절 만큼은 구제역도.한파도.유가인상도. 잊어 버리고 즐겁고.기쁜이야기만 나눌수 있을런지요. 모두들 정말. 정말 설날 고향의 기(氣)를 듬북받아 올 한해 주어진 능력과 지혜를 마음껏 발산 할수있는 2011년 되십시요. *아래 사진은 33년전(1978.2)애지리농원이 있는 고향마을에서 4 H .. 2011. 2. 2. 설날먹는 떡국의 유래는? 설날 마다 꼭 먹는 우리 고유의 음식 떡국은 역사적으로는 최남선(崔南善)의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 설날에 떡국을 먹는 풍습은 매우 오래 되었으며 상고시대 이래 "신년 제사때 먹던 음복(飮福)음식에서 유래된것" 이라고 설명 되어 있으며 또한 떡국을 끓여 먹는것은 고대의 태양숭배신앙 에서 설날은 새해의 첫날 이므로 밝음의 표시로 흰떡을 사용 하였고 떡국을 둥글게 하는것은 태양의 둥근 것을 상형 한것이라 한다 가래떡은 길고 가늘게 만들어 식구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봄을 맞아 풍요를 빈다고 하였는데 서울의 풍속을 적은 열양세시기(烈陽歲詩記)에는 흰떡을 조금씩 떼 손으로 비벼 둥글고 길게 문어 발 같이 늘리는데 이를 권모(拳摸)라 하여 무병장수를 기원 했다고 합니다. 평소 때도 떡국을 먹지만 설날 아침에 .. 2011. 2. 2. 찔레나무꽃 산이나 들에서 흔히 볼수있는 덩굴성의 잎떨기 나무로 고장에 따라서는 들장미.찔룩나무.새비나무.등 이름으로 불리어 지기도 하는데 꽃은 보통 5~6월경에 피고 장미과로서 9월 쯤에 열매가 붉게 익고 올해 자라난 새 가지 꼭대기에 다섯매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흰색의 꽃을 피웁니다. 찔레꽃도 따먹지만 꽃 보다는 봄에 새로나오는 찔레순을 부드러울때 꺽어 껍질을 벗기고 먹으면 싱그러운 향과 달콤한 맛은 그 시절 시골 어린이 들에겐 좋은 간식거리 였습니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 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어요.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재배방법) 분 가꾸기 경우에는 가급적 작은 분을 골라 가루를 뺀 산모래에 심으며 직사광선은 피하고 물은 보통으로 주며 꽃 피고 난뒤 대담하.. 2011. 2. 2. 곰방 담배대 곰방담배대 는 할아버지 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지금 기억엔 할아버지 들만의 전유물 이었는지도.. 마른 연초잎 한웅쿰 손바닥으로 비벼 곰방대에 채워넣고 화롯불에 같다대고 빠끔빠끔 빨아대면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며 불이붙어 타들어가 방안가득 담배 냄새가 코속에 베어 들어왔던 기억들 다 타고나면 담배재를 털기위해 곰방대를 꺼꾸로 탁탁치시던 그때 그시절의 우리네 할아버지의 모습 2011. 2. 1. 가야산심원사(深源寺)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에 소재한 심원사는 발굴조사에의해 300~400년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심원사가 거의 복원이 끝나가고 있고 마지막까지 심원사를 지켜왔던 삼층석탑은 1989년 복원하여 현재 자리에 안치 했다고함.(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6호) 심원사는 백운동 집단시설 주차장 뒷편 심원골 300m지점 해발600m쯤 에위치하고 있으며 심원사 입구에는 고 김건영 전 성주군수님의 망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만물상 에서 바라본 심원사 전경 입니다. 2011. 2. 1. 신당(新堂)은행나무(성주.수륜)도지정보호수 성주군.수륜면.신파리134번지 신당마을 뒷편에 있는 은행나무는 높이가20m둘레5.5m수령은 600년으로 추정. 가지는 동서와 남북이 각 12m 로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청휘당(晴暉堂)이승(李承)이 이마을에 살면서 1570년(선조3년) 집안에 심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1982년 도지정 보호수(11-1-4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1. 2. 1. 심산기념관(心山紀念館) 독립지사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선생을 기리기위해 1972년도에 성주읍 경산리 현 성주군청 뒷편에 대지 340평 건평 74평의 기념관과 기념관 뜰에 김창숙 선생 사적비가 이 인기(李寅基)의 글.도 이석(都利碩)의 글씨로 1974년도에 세워 졌습니다. 비신의 높이는 1.75m.너비는 65cm.두께는 39cm 2011. 2. 1. 산짐승 닭장습격 어젯밤에 산짐승이 닭장(하우스)을 습격하여 애지중지 방목하여 키우던 닭 여섯마리를 죽여 버렸습니다. 다섯마리는 목을 물어 죽이고 한마리는 반쯤 띁어 먹다가 놔두고 가버렸는데 가해자가 어떤 짐승인지는 아직 오리무중 인데 너무너무 화가나서 침입자를 잡아내어 너무 처참하게 죽은 닭들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반쯤 먹다놔둔 먹이감을 미끼로 놔두고 올 길목에 올무를 설치해 놓아 봤는데 처음 해보는 일이라 잡혀 줄련지 모르겠네요. 일단 오늘 밤을 지나봐야 ... 아래 사진은 살아 있을때 모습입니다. 2011. 2. 1. 호롱등 호롱등은 전깃불이 들어오기 이전 밤에 이웃집이나 이웃마을에 갈때 길을 밝히기 위해서 사용하던 도구로 지금의 손전등의 용도로 많이 쓰여졌었지요. 바람을 막기위해서 사면을 유리나 창호지를 발라 사용 하였으며 청사초롱 이라해서 특별한날 좀더 고급스럽게 만들어 사용도 하였는데 우리 야생화 중에 이것을 닮았다 해서 초롱꽃이라 이름이 붙여진 식물도 있습니다. 2011. 1. 31. 이전 1 ··· 186 187 188 189 190 191 192 ··· 20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