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애지리농원 주변문화는.57

예산리.배리댁(禮山里.裵里宅)성주읍 성주군 성주읍 예산3길 22번지에 소재한 이 건물은 1936년 도 문환(都文煥)이 건립한 살림집으로 결혼한 아들 도 재림(都在琳)내외가 분가하여 살도록 한 집으로 택호(宅號)는 도재림의 부인이 배리(裵里)마을에서 시집온데서 연유하며 평기와로 우진각 지붕을 이은 동향한 대문채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두고 ㄱ자형의 안채가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고 안채 전방으로 넓은 빈 터가 남아 있는데 이는 행랑채와 창고가 있었던 부지이며 가옥은 전체적으로 전통 한옥의 외관에 일본식 전통 가옥의 평면구조.창호.실내장식 등 2층 구조와 절충식 근대 가옥으로 한국 주거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 입니다. 이 건물은 2006년 9월 14일자로 도지정 문화재 자료 514호로 지정 2012. 12. 12.
옥성리.의열각(玉星里.義烈閣)성주.대가 성주군 대가면 옥성리 산72-3 번지에 위치한 의열각(義烈閣)은 일제에 저항하다 자결로 순국한 이 경환(李 慶煥.1902~1929)의사(義士)의 남편을 따라 자결한 그의 부인 성산배씨(星山裵氏)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의열각으로 이 경환 의사는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교토(京都)를 방문했을 때 한국침략의 부당성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철폐를 요구하는 직소장(直訴狀)을 제출 하려다가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고 옥고를 치르며 갖은 고통을 겪은 뒤 귀국 1929년 11월 빼앗긴 나라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탄식하여 목을 매 자결하자 부인 성산배씨도 남편이 죽은 지 3일만에 뒤따라 자결 하였다고 합니다. 이 경환 의사는 1968년 대통령 표창.1991년 건국훈장 애국.. 2012. 12. 12.
첨모재(瞻慕齋)성주.수륜.토실 첨모재는 수륜면 소재지를 지나 고령방향으로 200m쯤 가면 왼쪽에 토실마을 이정표를따라 들어가면 오른쪽 대가천냇가 다리를 건너 올라가면 산기슭 토실동네 초입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첨모재는 의성인(義城人) 계와 김담년(溪窩 金聃年:1530~1598)과 그 아들 신헌 김천흡(新軒 金天洽:1559~1633)양위(兩位)의 강학(講學)한 자리로 후손이 추모(追慕)하여 세워진 곳입니다. 계와 김담년은 김 용초의 7세손으로 사우당 김관석의 아들이니 가학(家學)에 힘써시장(詩章)에 능 했으나 불구문달(不求問達)로 효우(孝友)와 봉선(奉先).유후를 본분으로 살았으며 그의 형은 증 통정대부(贈 通政大夫) 백와 김담로(栢窩 金聃老)이고 아우는 유현(儒賢)서계 김담수(西溪 金聃壽:1535~1603)이니 남명 조식(南冥 曺植).. 2012. 12. 7.
도남서당(道南書堂)성주.대가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뒷개 부락에 있는 도남재는 대가면 대천 삼거리에서 금수방향으로가다 금수면과 대가면 경계지점 못미쳐 자래섬 부락 진입로 우측에 위치 하고있으며 1785년(정조9년)유림이 등암 배상룡(裵尙龍)과 괴재 배상호(裵尙虎)를 위하여 세우고 제향(祭享)하다가 1868년 폐사되어 도남재(道南齋)라 하고 바로 옆에는 영정(影幀)을 모시는 영각(影閣)이 있으며 이곳은 서암 배덕문(書岩 裵德文:1525~1602)이 처음 터잡고 살았고 그는 칠봉 김희삼(金希參)의 제자로 1553년 문과에 올라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냈고 1592년 왜란때 의병을 모아 훈업을 세워 오위도총관(五衛都摠官)에 증직 아들 서강 배 설(西岡 裵 楔:1551~1599)은 1583년 무과에 급제 왜란때 부상고개에서 왜장을 베고 15.. 2012. 1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