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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리농원 주변문화는.

성주.옥천서원(星州.玉川書院)성주.용암

by 애지리 2013. 3. 8.

이 서원은 조선 중기 인물인 이 사룡(李 士龍)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으로

숙종 18년(1692) 성주목사와 관내의 사민(士民)들에 의해 그가 살았던 곳인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작촌 마을에 충렬사(忠烈祠)로 처음 건립된 것에서 연유하며

정조 20년(1796) 사액되어 그후 충렬사는 옥천충렬사(玉川忠烈祠) 또는

옥천서원(玉川書院)으로 불려지다가 고종 8년(1872)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으며 1919년 직계 후손들의 집성촌이 있는 현 위치에 중건 되었습니다.

이사룡(李士龍.1595~1641)은 본관이 성산(星山) 자는 사중(士中)으로

조선 중기의 무인으로 그는 인조18년(1640) 청나라의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원병으로 징발되어 동북 지방의 전투에 출전 하였는데

이듬해의 접전에서 임진왜란 당시 입은 명의 은혜를 생각하여 전투에 임하여

명군에 공포(空砲)를 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해 그후 그는 의사(義士)로

불리게 되었으며 정조17년(1793) 성주목사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서원은 봉산마을 뒷편 산록 경사지에 위치하여 부지를 4단으로 조성

앞쪽으로 강당인 충의재와 동.서재가 자리하고 뒤쪽엔 사당인 충렬사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방법을 취하고 있으며

또한 강당 우측에는 서원이 훼철되었다가 중건되기 이전 사당의 역활을

대신 하였던 가묘(家廟)의 일곽이 자리하여 옥천서원은 건축적인 측면에서

사당과 가묘가 일곽내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원의 변화된 양상을

살필수 있을뿐 아니라 제향 주인공인 이사룡이 조선후기 숭명배청사상의

중요한 하나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매우 주목될수 있는 인물 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합니다.

선생은 성산이씨(星山李氏)로 능일(能一)의 후손이며 정건(廷建)의 아들로

1612년(광해4년)에 태어나 향년 29세 1640년(인조18년)에 돌아갔고

명나라 조대수(趙大壽)의 군대와싸우다 배반의 불가함을 역설하다

명나라 장수 조 대수가 "대명충신이요 조선의사"(大明忠臣 朝鮮義士)라

크게 써서 걸고 청 태조도 의로운 일이라 하여 소현세자(昭顯世子)가

환국할 때 그 주검을 운구하여 고국으로 돌아가게하니 인조가 지나는 길의 5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예장 하도록 하고 월항면 작촌 고산에 안장하게 하고

또 당시의 성주목사 최 유연(崔 有淵)에게 명하여 그 묘에 제문을 지어 제살를 올리게 하였으며

1692년(숙종18)향리 사람들이 그의 옛터에 사당을 짓고 옥천(玉川)이라 하였습니다.

(참고문헌: 성주대관.한국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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