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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 자연과문화를 찿아(국외)

일본 대마도 여행 (이즈하라.2)

by 애지리 2023. 12. 22.

도착 당일 날에는 이즈하라마치 시내를 중심으로 가까운 에보시타케 전망대에서 

약간 흐린 날씨가 조금은 원망스럽고 아쉬웠지만 최고의 명소라는

아소만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차창 밖으로 눈요기로 바닷가 와타즈미 신사와 시내에 하치만구 신사를 둘러보고

다음 행선지 니 카라이 토스가 생가터. 가네이시성. 덕혜옹주비와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찾아가본다.

현지인 가이드가 아닌 부산 출발부터 같이 동행한 여행사 가이드분이 일본 역사. 연관된

우리 역사에 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아주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줘 감사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 본다.

대마도를 다녀온 사람들 중에는 간혹 대마도는 볼 것이 없다고 한다.

반면에 어떤 분은 이렇게 주장한다." 대마도는 시설에 대한 눈높이는 낮추고

역사 공부로 머리를 채우라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말이다. 특히 뼈아픈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기에 새겨 들어야 될 부분이다.

대마도 여행객의 95% 가 한국 사람이며 한해 약 10만 명 정도가 대마도를 다녀 간다고 한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부산 대마도 항로에 6개의 선사가 배 8척을 운행하다 

지금은 팬스타쓰시마링크호와 니나호 2 척만 운행을 하고 있다.

 

나카라이 토스가 생가터 (나카라이 기념관 2006년 건립)

* 나카라이 토스가(1861~1926)는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이즈하라마치에서 출생하여

1881년 아사히 신문 기자로 한국에 근무하며 우리나라의 춘양 전을 세계 최초로 번역하여 

아사히 신문에 연재한바 있다. 66세에 사망하여 도쿄 고마고메의 요 쇼지 사찰에 묘소가 있다.

* 나카라이 토스 이는 제자였던 여류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1872~1896)가 2004년도에 

일본화폐 5천 엔권에 인물 도안으로 선정되며 스승이었던 나카라이 도스이가 주목을 받게 된다.

1891년 히구치 이치요가 소설 창작 지도를 받기 위해 나카라이 토스 이를 찾는다.

이때 토스 이는 " 조선에 부는 모래 바람"을 신문에 연재 중이었다고 한다.

히구치 이치요는 일본 근대 여성 문학의 선구자로 여성 서사의 신경지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1892년 "어둠진 벚꽃"으로 문단에 등장하여 1896년도에 당시 나이 25세로 폐결핵으로 사망을 한다.

히구치 이치요 작품으로는 "발칙한 그녀들" (작가와 비평). "가는 구름"(민음사).

"꽃 속에 잠겨" (민음사) 등이 출간되어 읽히고 있다.

* 나카라이 토스가 기념관은 에도시대 최후의 조선 통신사를 쓰시마에 맞이하였을 때

  막부 측의 관리가 숙소로 사용한 곳이기도 하다. 

* 에도시대 - 17세기 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현. 도쿄)를

  본거지로 창설한 에도막부(江戶幕府)가 집권하던 시대

* 막부(幕府) - 1192~1868 년에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한 세습적 군사 독재자인 쇼군의 정부로

  왕을 대신하는 지휘관의 편 진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나카라이 탄생지를 알리는 표지석

장기현(長崎県) 경관자산(1~27호)으로 등재되었다는 인증판

좌) 나카라이 토스가. 1861~1926  우) 제자 히구치 이치요 1872~1896.

일본 5천엔 지폐 인물 "히구치 이치요"

* 만엔권 일본 지폐에 실린 인물은 "후쿠자와 유키치" 로 메이지 시대 사상가로 사립대학

  게이오 대학교 설립자 이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말 진보적 정치가였고 개혁파 지도자였던 고균 김옥균  과는 친밀한 사이

  였다고 전해진다. 

  일본은 20년마다 화폐의 인물을 바꾼다고 하는데 내년도 2024년 7월3일 발행 계획인

  만엔 짜리는 근대 일본 경제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자와 에이이치" 와

  오천엔엔 일본 최초 여성 유학생 "츠다우메꼬" 가 선정 되었다고 한다.

후쿠자와유키치

가네이시성 (金石城)

*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이즈하라정에 있는 성(城)으로 쓰시마 후추(府中) 번주(藩主)

  소(宗) 가문의 거성으로 이곳 쓰시마후추번(對馬府中藩) 은 에도 시대에 300번(藩)의 하나로

  현재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사가현 도스시. 동부 및 기야미정. 시가현 가라쓰시.

  하마타마정 하마사키를 다스렸던 번이라고 한다.

* 번(藩)의 역사는 덴쇼(夫正) 15년 (1587년)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규슈 정벌 때

  쓰시마 소(宗) 씨는 사전에 도요토미 정권에 신하로서 따르기로 하여 본래의 영지를 그대로

  유지하였다고 한다.

* 1869년(메이지 2년) 쓰시마의 후추(府中) 지명이 이즈하라로 바뀌게 된다.

  후추는 이즈하라의 조카마치(城下町)를 가리키던 말로 조카마치는 일본 무가시대 다이묘(大名)

  거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로 성 아랫마을을 말한다.

  다이묘(大名)는 중세 일본의 각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를 가리키는 말로 한 마을의 실권자를 

  말한다.

* 가네이시성은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근세 성곽으로 개축하여

  일본 국가 사적과 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다.

  

이즈하라 박물관(공사 관계로 관람불가)

덕혜옹주비 (德惠翁主碑)

* 비문에는 " 이 왕가종 백작 가어 결혼봉축기념비" (李王家 宗伯爵家御結婚奉祝記念碑) 라

  새겨놓은 이 비는 1931년 10월 덕혜옹주 부부 대마도 방문 시 쓰시마 조선인 단체

  상애회 회원 성금으로 팔번궁신사 경내에 세웠다고 하는데 두 사람 이혼 후 

  주민들이 쓰러트린 후 방치하다. 2001년 부산 - 쓰시마 직항 선박 플라워호 취항으로

  전시용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현재 는  이즈하라 시미즈 공원에 세워져 있다.

*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 는 누구인가. 

  조선왕조 최후의 황녀 덕혜옹주는 조선 26대 왕 고종의 딸로

  고종 임금에게는 민 씨 소생의 순종 (이 척)

  장 씨 소생 의친왕 (이 강). 엄 씨 소생 영친왕 (이 은). 과 이복형제로 덕혜옹주는

  복녕당 양 씨 소생으로 생존한 3남 1녀 중 옹주는 하나뿐이다.(한국인물열전)

* 덕혜옹주는 1912년에 태어나 1925년 3월 24일 도쿄 유학 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셈이다. 당시나이는 14세로 서울 일신국민학교 (일출삼상소학교) 5학년 생이었다.

  1931년 5월 8일에는 당시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3학년이었던 쓰시마 36대 도주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 남편 나이는 24세로 다케유키 또한

  정략결혼의 희생자라 할 수 있다.

  소 다케유키는 대마고등학교 교가를 작사 작곡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55년 결국 협의 이혼을 하게 되며 이혼 후 양덕혜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등재되었다가

  1962년 1월 26일 38년 만에 고국에 귀국하여 다시 이덕혜라는 이름을 회복한다.

  이혼한 소 다케유카는 1985년 77세 나이로 쓰시마에서 사망하였고

  덕혜옹주는 1989년 77세 나이로 창덕궁 수강재에서 사망하였다.

어린 시절 덕혜옹주

수선사(修善寺) 슈젠지 표지판

수선사 입구

수선사 입구 진입로

수선사 경내

수선사

* 공식 일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수선사 사찰을 자유시간에 찾았다.

  이곳은 백제 출신 법묘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이곳의 특별함은

  일제 강점기 민족운동가. 의병활동가였던 면암 최익현 선생이 귀양 와 대마도에서 옥사하여

  수선사 절에서 장례를 치러 주었다고 한다.

  1907년 1월 1일 새벽에 옥중에서 순국하고 수선사에 2일간 안치후

  한국으로 이송되었다(독립운동인명사전)

수선사 경내 납골비석군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비 (수선사 경내)

* 최익현 (1833~1907) 선생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경기도 포천서 태어나 호조참판을 역임하였고

  1962년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 되었다.

  활동 사항은 흥선 대원군이 하야하는 계기의 상소를 올렸고 병자수호조약체결을 반대.

  항일척사운동. 의병활동. 조선의 수구파로서 개화를 반대하였으며 독립협회도 반대를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때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 병로가 의병 활동 중 의병대 부대원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최익현 선생이 일본으로 이송당할 시 일본땅을 밟지 않겠다며 양쪽 짚신 바닥에

  고국의 흙을 한 줌씩 담아 신고 갔다는 일화도 기억해 본다.

*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 -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시 가담한 다섯 매국노를 처단하라는 상소

  

만송원 이정표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역사관

* 이곳 이즈하라에는 곳곳에 조선통신사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통신사란 용어는 적례 (敵禮) 적인 입장의 대등 (對等) 한 국가 간에

  신의(信義)를 통 (通) 하는 사절을 의미하며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막부(幕府) 장군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사절로

  조선국왕이 막부장군(일본 국왕으로 칭함) 에게 보내는 사절을 통신사라 하고

  막부 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불렀다.

  보통 400~500여 명의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데 일본 측에서는 1,400 여척의 배와 

  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통신사 일행이 한양에서 에도(도쿄)까지 왕복하는데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1811년 통신사 마지막 방문 임진왜란 후 12 번째 쓰시마에서 선물과 편지만 교환.

  에도(도쿄)까지 가지 않고 쓰시마에서 맞아들임을 장소를 바꾸어

  맞아들이는 예라는 뜻으로 "역지빙례"라 한다.

* 우리나라 조선통신사 역사관은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 (범일동)에 위치하며

  이곳에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 차례 파견한 통신사에 대한 역사교육현장이라 

  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 비 (역사관 입구)

조선통신사 막부접우노지비

조선통신사와 당시 실세였던 막부(幕府) 정부와 접선한 우정의 장소임을 알리는 표지석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음)

 

관광안내 기념관

관광 기념관 도로변 조선통신사 접선 기념 표지석

조선통신사와 대마도의 교류 200주년 기념 벽화 (이즈하라항 근처)

쓰시마에서 조선통신사를 환송하던 곳 (고 라이몬)

* 2023년 쓰시마 이즈하라항 축제에 참석한 재현된 조선통신사 선박 (이즈하라항구와 통신사 배)

조선통신사 선박

* 설계를 28번 바꾸고 연습 항해를 7,600km  하였고 배제작 목재 금강송 900 여 그루가 소요.

  배 길이는 34m. 너비 9.3m. 돛대높이 22m. 

  이즈하라 항에서 부산항 까지 항해 시간이  13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2023.8.13일 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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