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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자연과 문화를 찿아(국내)/경상도

이상화고택(李相和 古宅)대구.계산동

by 애지리 2015. 2. 5.

저항시인 이상화(李相和)-(1901.4.5~1943.4.25)는 일제 강점기의 저항시인.작가.독립운동가.

문학평론가.교육자.권투선수 등의 직업을 거쳤으며

본관은 경주(慶州).호는 상화(想華).무량(無量).백아(白啞)이며

시인 이상화고택은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 이곳에서  이상화 시인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머물렀던 집으로 "이상화고택"이란 현판은 혜정 류영희 선생의 글 입니다.

 

생애

이상화는 1901년(광무 4년) 4월 5일 경상북도 대구부 서문로 12번지의 양옥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로 김해 김씨이다. 4형제 중 둘째이다. 형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이며, 셋째 아우 이상백은 한국최초의 IOC위원이자 한국 사회학계의 선구자이고 넷째 아우 이상오는 정통 수렵가이자 바둑 유단자이다. 그의 집안은 대구의 명문가로 대 부잣집이었으나 아버지 이시우는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할아버지 이동진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대구에 신식 학교인 우현서루를 열어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남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나중에는 교사를 초빙, 수학, 역사, 국어, 영어, 일본어 등 신식 학문을 가르쳤다. 할아버지 이동진의 뒤를 이어 큰아버지 이일우가 우현학교의 일을 맡아보았다.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했는데, 2000년대 초반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학 학장 3명, 교수 10명, 의사 30명, 장군 2명, 언론·출판분야 11명을 배출하였다.[1] 또한 사촌 이상악은 작가이자 그의 친구인 육당 최남선과 사돈이 되었고, 다른 자손들 중에는 '박작대기' 박중양 집안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1]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4세까지 큰아버지 이일우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큰아버지 이일우의 훈도를 받으며 우현학교(교남학교로 발전했다가 현재 대구 대륜중학교, 대륜고등학교가 되었다.)에서 수학하였다.

학창 시절과 문단 등단

1915년 경성부중앙학교(지금의 서울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1918년 봄에 경성 중앙학교를 중퇴하였고, 자퇴 직후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

열아홉 되던 1919년 대구에서 백기만 등 친구들과 함께 3·1 만세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 밀정의 추적으로 주요 인물들이 잡혀가자 경성부로 올라와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 한동안 은신하였다. 1921년현진건의 소개로 월단 박종화(朴鍾和)와 만나 〈백조〉 동인에 참여했고, 박종화의 소개로 홍사용(洪思容), 나도향, 나혜석, 박영희(朴英熙), 이광수, 최남선 등 문인들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이 중 육당 최남선은 그의 큰집과 사돈간이 되면서, 그에게도 사돈이 된다. 훗날 그의 사촌 이상악의 딸이 최남선의 며느리가 되었다.[1]

사촌 매형인 윤홍열은 후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위원과 대구시보사 사장을 역임했는데, 사촌 매부 윤홍열의 소개로 바로 충청남도 공주 규수인 서순애 여사를 상화와 중매시켰다.[1] 몇 차례 연락이 오고가다가 1919년 12월 충청남도 공주군 출신 서온순(徐溫順)과 결혼하였다. 부인 서온순은 독립운동과 유학 등 경제적으로 불우한 환경에도 남편의 탓이나 원망을 하지 않았다 하며, 남편 사후에도 서온순은 재혼하지 않고 홀로 자녀를 키웠으며 1980년대에 사망하여 그의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1922년 이상화는 《백조》1~2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해 프랑스에 유학할 기회를 얻으려고 일본으로 갔다.

작품 활동

문학, 동인 활동

1922년 《백조》 1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세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백조》 나머지 호, 《개벽》, 《문예운동》, 《삼천리》, 《여명》, 《신여성》, 《조선문단》, 《조선지광》, 《별건곤》등 잡지에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행진곡〉, 〈서러운 해조〉등 6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전에 출간된 시집은 없으며, 사후 1951년 백기만이 청구출판사에서 펴낸 《상화와 고월》에 시 16편이 실렸고, 이기철 편 《이상화 전집》(문장사, 1982)과 김학동 편 《이상화 전집》(새문사, 1987), 대구문인협회 편 《이상화 전집》(그루, 1998) 등 세 권의 전집에 유작이 모두 실렸다. 대표적인 작품들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 프랑세 어학원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였다. 일본 유학 중에도 틈틈이 작품 활동을 하거나 칼럼과 글을 국내의 잡지사로 송고하였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나자 불령선인으로 몰려 일본인 폭도들로부터 암살 위협을 겪었으나 극적으로 어느 일본인의 배려로 은신해 있었다. 얼마 뒤 분장하고 집주인인 일본인이 준 여비를 받고 관동 대지진의 수난을 피해 귀국했다.

1926년 《개벽(開闢)》에 발표되었다. 작자의 반일(反日) 민족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비탄과 허무, 저항과 애탄이 깔려 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겨 얼어붙어 있을 망정, 봄이 되면 민족혼이 담긴 국토, 즉 조국의 대자연은 우리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국토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즉 피압박 민족의 비애와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귀국과 문학, 언론 활동

1925년에 작품 활동을 활발히 했다. 시뿐만 아니라 평론, 소설 번역에도 힘썼다. 8월에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7년 대구로 돌아왔다. 1927년에는 의열단원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1933년 교남학교(지금의 대륜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담당 과목은 조선어와 영어, 작문이었다. 이듬해 교남학교 교사직을 사직했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사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으나 이재와 상술에 눈이 어두워서 결국 1년 만에 실패하고 다시 교남학교의 영어, 작문담당 교사로 복직하였다.

생애 후반

1937년 3월 만주에 있던 큰형 이상정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왔다. 그가 형을 만난 사실이 확인되면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으나 특별한 혐의점이 없어 그해 11월 말경 가석방되었다. 다시 대구로 내려와 교남학교에 조선어, 영어, 작문담당 교사로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했다. 또한 교남학교 권투부를 창설하여 지도하기도 했다. 그는 약소 민족은 주먹이라도 잘 써야 된다며 학교 체육대회 종목에도 권투를 넣었는데, 교남학교 권투부 출신들은, 졸업후 훗날 대구 권투 클럽을 결성하였다.

1940년 대구부 계산 2동에 집을 마련하였다. 그가 새로 마련한 집 바로 앞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 서상돈 고택이 있다.[2] 1940년교남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대구부 계산2동 84번지의 집에서 주로 생활하며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그해부터 춘향전영어로 번역하고, 이어 한국 국문학사불란서정석 등을 한글로 번역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만다.

1943년 초 갑자기 쓰러졌다가 그해 3월에 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경상북도 대구 자택에서 위암폐결핵장결핵의 합병증으로 숨졌는데 이상화의 오랜 친구인 소설가 현진건도 같은 날 경성부에서 폐결핵장결핵합병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사후

1948년 3월 14일 김소운이 발의하고 이윤수, 구상 등이 참여하고 죽순시인구락부가 협찬하여 시인을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를 달성공원에 세웠다.[3]

1999년 대구광역시 도시개발로 한때 서상돈 고택 및 이상화 고택까지 허물 위기에 맞았으나 1999년부터 시민운동 차원에서 고택보존 운동에 이르렀고 2008년 8월 13일 결실을 맺어 이상화 고택 개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2] 이상화 시인의 고택은 2008년 8월 12일 새롭게 단장되어 일반인들에게 문을 열었다. 도시개발로 헐릴 위기까지 맞았던 이상화 고택이 시민들의 모금활동과 100만 서명운동 등으로 보존, 공개되었다.[2] [4]


2009년 초부터 대경대학교 뮤지컬학과 학생들은 이상화의 일대기를 뮤지컬로 제작하였다. 대본을 맡은 학생 허윤선은 이상화의 둘째 아들인 이충희를 수소문해 이상화 시인의 삶에 대해 묻고 극을 구성했다.[5] 이들은 지난 6개월간 시인의 삶을 기록한 책자를 참고하면서 대구시 중구 계산동 소재 이상화 고택을 수십차례 방문해 당시 분위기를 몸에 익혔다. 대경대 뮤지컬과 1학년 학생 30여명은 1920년대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저항시인으로 뜻을 굽히지 않은 이상화 시인의 삶과 비극적 역사상황을 담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만들었다.[5]

2009년 11월 30일12월에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창작뮤지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공연되었다.[6]

작품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말세의 희탄
  • 단조
  • 가을의 풍경
  • 가상
  • 나의 침실로
  • 몽환병
  • 구루마꾼

학력

이상화 시인이 살았던 주택

 

 

 

울적한 마음을 달랬던 감나무

마당에 세워진 대표 시비

 

 

 

 

 

 

이상화 고택과 접해있는 대구의 근대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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