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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자연과 문화를 찿아(국내)/경상도

서상돈 고택(徐相敦 古宅)대구.계산동

by 애지리 2015. 2. 5.

국채 보상운동으로 우리의 국권을찿고자 나라 빛을 갚자는

모금활동에 중심에 섰던 민족운동가 서상돈의 삶의 터전 이었던

서상돈 고택은 대구시 계산동 2가 84-1 계산성당 옆 이상화 고택과 마주보고 있습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명 상돈(相燉). 세례명은 아우구시티노. 서울 출생.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가문이 되었고,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강원도와 충청도로, 1839년(헌종 5) 기해교난 때는 경상북도 문경·상주 등지로 피난, 1859년(철종 10) 대구에 정착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교난 때는 신앙문제로 문중에서 쫓겨나고 가산도 탕진해버렸다. 1871년 대구로 돌아온 뒤 독학을 하면서 지물(紙物) 행상 및 포목상을 시작하였다. 1886년경 상당한 재벌로 부상했으며, 이후 정부의 특명으로 경상도시찰관에 임명되었다.

이 때부터 대구교회 로베르(Robert, A. J., 金保祿)신부를 중심으로 교회발전에 힘썼다. 시찰관에서 퇴임한 뒤 실업계의 중진으로 대구의 경제권을 좌우할 만큼 갑부 대열에 들었다. 그 뒤 대구교구가 설립되자 이의 발전에 힘쓰면서 성직자 돕기와 수녀 보호에 솔선수범하였다.

한편, 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서 이의 수호에 앞장선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약했는데, 독립협회 제4기 민중투쟁기에는 재무부과장 및 부장급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2월 16일 대구 광문사(廣文社)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마친 뒤,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채 1300만환을 보상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이 자리에 참석한 회원들이 2,000여환을 갹출하고,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다.

그 요지는 국채 1,300만환은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으로, 2,000만 국민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하지 않고 그 대금 20전씩을 거둔다면 1,300만환을 모을 수 있으며, 나머지는 특별모금한다는 것이었다.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등과 함께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 등을 비롯한 민족언론기관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때 모인 자금은 그 뒤에 전개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쓰였다.

 

   徐相燉(?-1913). 대구교구의 초대회장.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그는 조부 때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일찍이 박해를 피해 서울에서 충청도 제천(堤川)으로, 다시 제천에서 경상도 상주(尙州)로 피신하였다가, 그가 10세 때 대구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 당시 대구에는 가톨릭 신자라고는 몇 집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는 상업으로 재산을 모으기 시작하여 대구에서 손꼽히는 부호가 되고, 더구나 그의 독실한 신덕과 인격은 많은 사람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의 권면으로 교인이 되었다. 더욱이 그는 자선사업에 헌신하여 봄과 가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수백 석의 식량을 희사하였는데, 그의 이런 자선에 감읍하여 입교하는 자가 많았다. 그는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처음으로 대구본당을 개척하자,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 대구교구 설정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큰공을 세웠다. 1911년 조선교구가 둘로 나뉘게 되자, 그는 남조선교구의 주교 소재지를 대구로 유치하기 위하여 맹렬히 운동하여 뜻을 이루었다. 드망즈 주교가 대구로 부임하자, 그는 대성당 앞의 매씨(妹氏)의 집을 주교의 사택으로 제공하는 동시에, 자기 소유인 수만 평에 달하는 남산화원 전부를 교구사업에 희사하였다. 여기에 대구교구의 중추기관인 주교관 · 신학교 · 수녀원 · 고아원 · 성모루르드 마사비엘 동굴 등이 들어서니 대구교구는 반석같은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평소의 소원이던 성모루르드동굴이 이 화원 언덕에 건립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13년에 선종하였다.

   한편 그는 교회와 관계된 활동 이외에도 1907년 1월부터 국채보상운동을 주창, 각종 신문의 보도를 통해 전국에 확산되고 국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면서 전개시킨 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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