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삼층석탑에서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바라보면 작은 석조물 하나가 있다. 그 모습은 석등石燈과 유사하지만 그 모양 은석 등처럼 화려하지는 않다.
해인사는 신라시대 802년(애장왕哀莊王3)에 순응, 이정이 창건하였다. 큰 법당인 대적광전은 당시 비로전이라는 2층 건물이었는데 조선시대 1488년(성종成宗19) 인수대비, 인혜 대비의 지원으로 학조學祖대사가 중창하면서 지금 의대 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해인사는 통일신라시대 때 왕실 원찰 기능을 담당하던 사찰로서, 큰절에 남아 있는 석조유물인 해인사 삼층석탑, 석등, 당간지주, 길상탑, 정료대는 그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정료대는 원래 사찰, 서원 등에서 야간 행사가 있을 때 관솔 지나 송진 등을 태워 경내를 밝히던 것으로 노주석 또는 불우리라고도 한다. 현재 우리나라 사찰에서 정료대가 남아 있는 예는 회암사지와 해인사, 봉암사, 대승사 등이 있으며, 조선시대 향교나 서원에는 다수의 정료대가 남
아 있다. 대부분의 정료대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정료대지만 해인사 정료대는 국내 유일의 통일신라시대 정료대로 추정된다.
정료대는 대부분 높이 1~1.5m 정도의 4각角내지 6각 또는 8각 기둥(柱) 형태로 되어 있고 상부석은 보통 원형의 사발 모양이나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회암사지와 봉암사의 정료대는 조선시대 정료대로서 4 각기둥에 네모 반듯한 상부석을 올려놓은 잘 짜인 단壇과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해인사 정료대는 회암사지와 봉암사의 정료대와는 다른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상단에서 하단으로 내려올수록 점차 좁아지는 8각 기둥에 상부석은 활짝 핀 연꽃을 바위에 고스란히 담아놓은 듯한 연화문양이 부처님의 연화대좌蓮花臺座를 연상시키는데 이것은 다른 정료
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자연스럽다. 뿐만 아니라 해인사 정료대에는 장인의 숨은 재치도 남아 있는데 비례가 맞지 않는 상부석은 제멋대로 빚어진 우리 옛 그릇을 닮은듯하다.
정료대는 해인사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8 각기둥은 비와 바람에 의해 많이 마모가 되어있는 상태이며 상부 석도 자연의 섭리에 의해 균열이 가고 박락되어 작은 미생물들의 서식처가 되어버렸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병이 나고 나약해지는 것처럼 이 작은 석조물도 탈이 나고 병이 난 모양이다. 혹시나 부서질까 봐 상부석에는 길고 단단한 철사가 돌을 연결시켜주고 있다. 하지만 비가 올 때마다 철물이 돌 표면에 스며들어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키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대적광전의 문을 열면 비로자나毘盧遮那부처님이 경내를 내려다보신다. 정료대는 아마도 부처님이 모든 중생衆生들을 보살펴보시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환히 불을 밝혀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행修行을 하시는 스님들의 밤길을 밝혀 주어 불편함이 없도록 해 주는고마운이가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월간 해인지 (2007.5월 303호 발췌)
* 정료대(庭燎臺)란- 원래 사찰. 서원 등에서 야간 행사를 할 때 관솔 지나 송진을 태워
경내를 밝히던 것으로 노주석 또는 불우리 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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