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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국립공원에는/구석.구석 알아야 할곳

가야산 해인사 원표(元標)표지석(경남.합천)

by 애지리 2015. 6. 17.

경남.합천.해인사 일주문 들어가기전 10 여m 전방에 사각형 이정표 표지석이 서있는데

한자로 원표(元標)라 음각되어 있으며

4면에는 합천군.거창군.진주군.고령군.대구부는 거리가 표시되어 있는데

김천군.성주군은 거리 표시가 없네요.

합천군은 九里 三十三町  진주군은 二十二里 九町  거창군은 十二里 十三町

고령군은 八里  대구부는 十七里 二十四町라 음각 되어 있는데

 

1리는 지금의 10 리에 해당되며

1정은 360자로 약 109m 정도 된다고 하면

합천군은 9리 33정으로 환산하면 약 40km 정도의 거리가 됩니다.

* 아래 글은 2005년 7월호 월간해인지에 실린 글 입니다.

 

해인사 일주문 옆 원표元標를 아시나요!

이 달의 이야기 - 종현 / 해인지 편집장 2005년 07월 281호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스님들도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모를 해인사 이야기를 7월호 특집으로 잡고 고민하던 차에 현진 스님께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했다. 뭐가 있을까 고민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는데 현진스님은 대뜸 세 가지를 얘기해 주셨다.
행전, 정수당 앞 모래통, 그리고 원표.

행전, 모래통은 알겠지만 원표에 대해선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해인사에 10년을 넘게 살면서 나름대로 구석구석 모르는 것이 없다싶을 정도로 자부심을 갖고 산 나로서는 모른다는 것이 은근히 기분 나쁜 일이었다.
일주문 옆에 있다는 원표에 가 보았다.
늘 보면서 저게 왜 여기 서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지만 늘 지나치곤 했던 석주였다.
자세히 보니 그 옛날 먼거리의 지역을 동, 서, 남, 북으로 나누어 거리를 표시한 안내석이었다. 원문 내용을 그대로 적어본다.

동쪽 합천군 9리 33정 → 약 3.6㎞
陜川郡 九里 三十三町
야로시 4리 13정 → 약 1.6㎞
冶爐市 四里 十三町
서쪽 김천군金泉郡(거리가 새겨져 있지 않음)
성주군星州郡(거리가 새겨져 있지 않음)
남쪽 진주군 22리 19정 → 약 8.8㎞
晋州郡 二十二里 十九町
거창군 12리 13정 → 약 4.8㎞
居昌郡 十二里 十三町
북쪽 고령군 8리 → 약 3.2㎞
高靈郡 八里
대구부 17리 24정 → 약 6.8㎞
大邱府 十七里 二十四町

높이가 3미터 정도 되고 폭이 20센티 정도 되는 사방 돌기둥에 음각으로 세밀히 새겨 넣은 석조물이다.
1리를 400미터, 10리를 4킬로로 계산했을때 거리를 환산을 해 보았다. 리里 밑에 정町의 단위까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해인사 일주문으로부터 진주까지가 8.8킬로, 합천이 3.6킬로, 대구가 6.8킬로로 나왔다.
특이한 것은 야로시冶爐市를 4리 13정으로 표시했는데 지금의 88고속도로 해인사 나들목 부근에 있는 야로면의 물건 파는 시장을 표기한 것으로 추측해본다.
세밀히 계산을 해보고 나니 뭔가가 좀 이상했다. 지금의 거리와는 10배 정도 적게 기록된 것이다.
인터넷 지도상 거리표시를 확인 해본 결과 해인사에서 진주가 70여 킬로, 합천이 30여킬로, 대구가 60여 킬로로 나와 지금과는 거리가 십 여배 차이가 난다.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원표에 표시된 지명이 대구부大邱府, 진주군晋州郡 등 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910년대를 전후한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원표임을 짐작해본다.
일제 강점기 때의 측량법으로는 일본의 도량형 제도로 개정되면서 영조척 대신 일본의 곡척(曲尺·30.303㎝)이 제정돼 모든 척도의 기본이 되었다. 처음으로 척관법 단위를 미터로 환산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1리는 2100척(자), 420m이며 기존의 1리 400미터와 20센티의 차이가 난다. 그래도 10배면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그런데 1961년에 국제 기준에 따라 우리의 계량법을 갖게 되었고, 1977년부터 도량형 계산법이 시행 되었다. 여기에서 1리가 약 3.9㎞로 정해져 10리는 약 40㎞가 된다. 기존의 ‘1리=약 0.4㎞’와는 정확히 10배 차이가 난다.
1977년도에 시행된 도량형 계산법에 의해 1리를 4킬로로 계산해본다면 해인사 일주문으로부터 진주까지가 88킬로, 합천이 36킬로, 대구가 68킬로로 해인사 일주문 원표에 표시된 거리와 거의 일치한다.
그렇다면 1977년도에 시행된 측량제도로 1910년대에 원표를 세웠다는 얘기가 되는데…… 더 세밀히 조사해 봐야겠다.

해인사 원표에 대한 관심으로 인터넷 여기저기를 검색해보니 현대에는 도로교통법에 의거 각 시와 군의 정중심부에 원표를 의무적으로 설치하게 되어 있어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다른 지역까지의 거리를 한눈에 알게끔 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100여 년 전의 원표가 서 있다는 사찰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해인사 일주문 원표는 그 독보성과 희귀성이 가히 대단하다 할 것이다. 그 옛날 지방 관청도 아닌 사찰의 일주문에 원표를 세워두고 지방을 오가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게 하였으니 해인사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역할을 했다는 것은 굳이 설명을 안 해도 증명이 충분하다.
무심히 지나치며 화강암 조형물로밖에는 보지 못했던 석주가 위상과 권위가 많이 떨어진 지금의 불교 세태에 바른길을 제시하는 이정표가 되길 바라면서 그 옛날 많은 서민들이 분주히 오가던 일주문 앞 거리를 기분 좋게 상상해본다.(출처: 해인월간지 2005년 7월호 2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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