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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국립공원에는/고운 최치원 발자취

최치원의 발자취를 찿아(가야서당.유상곡수.농산정)

by 애지리 2016. 1. 10.

해인사 매표소인 홍류문을 지나 농산정을 가다보면 도로 우측 언덕에

최치원이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가야서당이 자리 잡고 지금의 가야서당(伽倻書堂)은

1937년 사림과 후손들이 건립 하였으며

서당 옆에는 최치원의 업적을 기리기위한 문창후유허비(文昌候遺墟碑)와

최치원 영정을 모셔놓은 학사당이 있습니다. 

* 가야서당 왼편 처마아래에는 류수헌(流水軒) 이라는 현판과 오른쪽 앞면에는 지척루(咫尺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앞쪽 다섯개의 기둥 주련(柱聯)중 4개의 기둥에는 고운 최치원의 시 "제가야산독서당이란" 글씨를 써

걸어 놓았습니다.

류수헌.지척루 란 현판의 글귀도 제가야산독서당 싯귀에서 인용 하였다고 합니다.

"인어난분지척간(人語亂分咫尺間)

"고교류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

주련(柱聯)이란: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로 기둥마다 시구를 연달아 걸었다는 뜻

 

 

 

 

* 문창후 최치원 유허비(文昌侯 崔치源遺墟碑)

* 문창후 신도비는 경남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54-1번지에 위치

* 문창후(文昌候)는 최치원 시호(施號)

 

 

 

 

유상곡수(流觴曲水) 

가야산 해인사나 팔만대장경전을 갈려면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을 통과 해야 되는데 일주문 들어 가기전 오른쪽 공터에 보면

돌로 설치된 둥근 도랑같은 구조물이 방치 되어 있어 해인사를 찿을때마다

표지판도 없고 가야산 해인사 관련 책자에도 기록이없어 궁굼하던차에

해인사에서 발행하는 월간 해인지 2015년(불기2559년.단기4348년) 6월(400호)

뒷표지에 실려있어 올려봅니다.

 

* 1625년 가야산과 유람한 뒤 남긴 허돈의 "유가야산기"에 유상곡수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눈썹이 진하고 흰 머리의 늙은 승려가 나와 말머리에서 인사를 하엿다.

일주문을 통하여 들어 갔는데.일주문 위에는 석천(石泉)임억령(林億齡)이 지은 오언절구가

있어서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문 밖에는 돌을 깍아 빙 돌아가게 하여 유상곡수(流觴曲水)를 만들었는데

이것도 또한 최치원의 자취라고 한다"

허돈의 기록되로 실제 최치원의 자취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잔을 띄우고시를 짓던

유상곡수는 분명한 것 같다.경주의 포석정과 같은 기능의 유상곡수가 해인사에

남아 있으나 개화기에 분수로 개조되어 쓰이다가 지금은 그마저도 기능을 상실하고

방치되어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농산정(籠山亭)

신라의 대표적인 유교학자 고운.최치원(孤雲.崔致遠)이 은거 생활을 하던 당시에

글을 읽거나 바둑을 두며 휴식처로 삼았던 곳으로 조선시대 유림에서 최치원을

추모하여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이곳 가야산 홍류계곡에 정자를 세워 농산정(籠山亭)이라

이름 지웠는데 이는 고운.최치원의 자작시 "이는 세상의 시비가 귀에 들릴까 저어하여

짐짓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다 막았네" 라는 시 구절에서 인용 했다고 합니다.

농산정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가야산로 531 에 위치하고 있으며

근래엔 가야산 소리길 구간 매표소 지나자마자 계곡을 건널수있는 다리를놓아

농산정으로 건너 갈수가 있습니다.

1990년 1월 16일 자로 경남 문화재 자료 172호로 지정 . 지금의 건물은 1922년에 해체

1936년에 다시 보수하여 정자는 정면 2칸.측면2칸 규모의 단아한 정방형의 목조 기와집으로

정자 현판에는  김영한(金寧漢)이 쓴 농산정기(農山亭記)와 찬양사(讚揚辭)4 수(首)가 기록.

둔세시를 차운(次韻)한시 8 수(首)가 있으며 시 중에는 점필제 김종직 선생의 차운시도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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