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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유적지를 찿아(천주교)

순교자묘역(殉絞者墓域)제주.봉개동

by 애지리 2015. 2. 4.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제주 황사평 순교자 묘역은 18,000 여평의 부지에

1984년 공원묘지를 조성하여

1995년 신 아우구스티노(재준).김 토마(영만).양윤경 등 당시 순교자 28기를 합장

하였으며 1866년 병인박해때 경남 통영에서 순교한 김기량(펠릭스베드로)순교비도

건립 되어 있습니다.

초대 제주 교구장 현 하롤드 대주교의묘와. 파리외방 선교회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공덕비가 있으며

아래 글은 김기량 순교자가 복자에 추대된 기사를 언론에 실린 내용 입니다.

 

김기량, 제주출신 첫 복자 추대

제주 첫 천주교 신자·순교자
오늘 교황 시복식 명단 포함
  등록 : 2014년 08월 15일 (금) 15:17:22 | 승인 : 2014년 08월 15일 (금) 15:29:59
최종수정 : 2014년 08월 15일 (금) 18:00:56
정성한 기자 open.ing@hanmail.net  
   
 
  ▲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초상화  
 

제주의 최초 천주교 신자이자 순교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1816~1867)가 복자(福者)로 추대된다.

교황방한준비위원회(위원장 강우일 제주교구장)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를 공식 사목(司牧)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국내 천주교 순교자 124위(남성 100위·여성 24위)에 대한 '시복식'을 주례한다.
 
'시복'은 가톨릭교회가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하는 것이고 '복자'는 천주교에서 죽은 사람의 덕행 기려 부르는 존칭으로 성인(聖人)의 바로 전 단계다.
 
이에 따라 제주 출신 첫 복자가 탄생한다.
 
함덕리 출신 어부였던 김기량은 1855년 서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중국 광동까지 표류하다가 영국 배에 구조돼 홍콩으로 가게 된다. 그 곳에서 페낭(Penang) 신학교 조선인 신학생을 만나 그의 가르침으로 세례를 받고 1858년에 귀국했다.
 
서울에서 페롱(Perong) 권 신부와 최양업(토마스)신부를 만나 교회 서적을 얻고 제주에 돌아온 김기량은 40여 명을 입교시키는 등 전교에 집중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가 한창일 때, 새로 입교한 이들을 영세시키려고 육지부로 이동 중 통영 앞바다에서 관헌에게 체포돼 처형됐다.
 
앞서 천주교 제주교구는 1998년 김기량의 신앙적 모범을 기리기 위해 제주시 아라동 황사평 순교자 묘역 내부에 '김기량 순교비'를 건립했고, 2005년에는 김기량의 고향인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서 김기량 순교 현양비를 세웠다.
 
또 제주교구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관광공사는 지난 6월 조천성당~조천포구~환해장성~신흥포구~함덕포구~함덕해변~서우봉 입구~김기량 생가터~김기량 순교현양비에 이르는 9.3㎞의 길을 '김기량길'로 명명하고 성지순례 지역으로 선정하는 등 성역화 사업을 진행한 바 있다. 서울=정성한 기자

 

황사평 - 신축 교안의 순교자 묘역





1901년 5월 5일, 제주도 남쪽의 대정 지역에서는 '상무사'(商務社) 회원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여 난행하기 시작하였다. 상무사는 지역민들이 설립한 사설 단체로 천주교 세력이 퍼져 나가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던 터에 부당한 세금, 지방민과 교인들의 알력, 서양과 일본 세력의 제주도 진출 등이 문제가 되지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시키려고 하였다. 제주의 신축 교안(辛丑敎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제주에 복음이 전파된 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박해 이후 한 명의 신자도 없던 제주에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한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1898년 4월 22일 '제주 본당'을 설립함과 동시에 프랑스 선교사 페네(Peynet, 배)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제주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페네 신부는 육지로 전임되고 라크루 신부가 새로 부임하였으며, 김 신부는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의 한논(大沓)에 정착함으로써 새 본당을 설립하였다. 김원영 신부의 활동은 실로 눈부셨다. 그의 전교 덕택에 교안 발발 직전까지 제주의 교세는 2개 본당에 신자 수 241명, 예비신자 수 62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교안은 5월 5일부터 6월 초까지 20여 일 계속되었다. 처음 상무 사원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라크루 신부와 김원영 신부는 피정차 육지에 나와 있었으므로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한편 뮈텔 주교는 피정 중에 인사 이동을 결정하여 김원영 신부를 육지에 남기는 대신 무세(Mousset, 문) 신부를 한논 본당에 임명하였다. 5월 10일 라크루 신부와 무세 신부는 제주에 들어가 제주성에 갇혀 있는 신자들과 생사를 함께하였으며, 5월 28일에는 제주성이 난민들에게 함락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학살되었다.



폭도들은 그들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끌어내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여자 교우들의 새로운 학살 소식과 화재 소식이 도처에서 들려왔습니다. 김원영 신부의 회장인 박 고스마는 묶인 채 매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 그 곳에 저의 복사 아우구스티노가 있다가 도망쳐 왔습니다. 동헌 마당으로부터 거친 소리들이 들려왔고, '천주교 아이놈은 어디에 있느냐?'는 외침도 들렸습니다. 벽장에 숨어 있던 아우구스티노는 마침내 폭도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아, 하느님, 제 아이가 잡혔습니다. 그는 고문을 당했고, 폭도들은 그 아이의 빰에 총을 들이대고 여러 차례 발포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시여 … 예수님, 성모님 …."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하여 살해되었습니다(라크루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01년 6월 11일자 서한).



교안의 결과 천주교 신자와 예비신자 중에서 약 300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기록의 미비로 신자와 비신자, 순교자와 단순 희생자를 규명해 내기는 쉽지 않다. 다만 라크루 신부의 다음 기록을 빌리면, 복사 신재순(아우구스티노)과 같은 경우에는 신앙 증거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18세의 젊은이로 순진하고 양식을 갖춘 가톨릭 신자였고, 천사와 같은 삶을 살았으며, 헌신적이었고, 그 밖에도 많은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위의 서한 참조).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뒤 교안 희생자들의 시신은 관덕정 앞에 모아졌고, 그 가운데 대부분은 가족들이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 때 연고가 없는 시신들은 5월 말에 일단 사라봉(제주시 화북동) 아래에 묻혔다가 2년이 지난 1903년 4월에 매장지가 황사평(당시 화북 2동의 황새왓)으로 결정되면서 모두 이 곳으로 이장되었다. 이후 제주 신자들은 황사평을 순교자 묘역으로 생각하여 해마다 현양 행사를 개최해 왔으며, 1995년에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한곳에 모은 합장묘를 조성하면서 묘역을 새로 단장하여 순교 사적지로 가꾸었다.



< 차기진, 사목 254호(2000년 3월호), pp.76-77>

 

 

 

 

 

 

 

 

 

 

 

 

천주교제주교구.순교자묘역.황사평묘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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