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542번지에 있는
백세각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163호로
지정된 곳으로 1919년 3 .1 운동 당시
송준필을 위시한 그 문인들이 성주 장날이 서는날에
배포할 태극기를 제작.보관했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성주의 유학자들은 3.1운동 .제1.2차 유림단 사건 등에
항일 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주도적인 역활을 한 사람이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과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으로서
1919년 3월1일 성주에서도 만세운동이 3월27일
선남을 시작으로 가천면 동원리를 거쳐
4월2일 성주 장날에는 대대적인 만세 시위가 벌어 졌는데
공산은 "사생은 천명이다.
나라가 회복되면 죽더라도 사는것이요.
나라가 회복되지 않으면 살더라도 죽은 것이다"
라고 선언한후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으며
만세운동은 한밤중 까지 이어 졋다고 한다.
또한 백세각은 3.1운동은 물론 "파리장서사건"을
모의한 것이기도 하며 프랑스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려 약소국가의 자주독립을 논의 한다는
소식을 접한 공산은 조선의 억울함을
세계 만방에 알릴 "천재일우"의 기회라 생각하고
유림의 뜻을 모아 만국회의에 장서를 보내기로
했으며 회당(晦堂)장석영(張錫英)이 초고를 쓰고
면우 곽종석이 수정을 해 장서를 완성 시키고
심산 김창숙이 파리에 가기로하고 우여곡절을 겪고
심산은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전달 하고 우리의 독립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렸으며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단 137명중 13명의 성주유림이
주도적 역활을 했었고 독립운동의 산실 이었던
백세각은 조선 전기 문신인 야계(耶溪)
송희규(宋希奎)가 지은 건물로 사헌부 집의로 있던
송희규는 당시 세도가 윤원형등의 행패를 탄핵하다
역적으로 몰려 전라도 고산(高山)에서 5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고향에 돌아와 백세각을 지었으며 백세각의 규모는
정면과 측면이 각 7칸으로 평면은 ㅁ자형에맞배 지붕을 하고 있으며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엮어
대패를 쓰지않고 손토끼(자귀)로만 다듬어 만든
건축물이라는 특성을 가지고있다.
아래 사진은 백세각 외부와 내부 모습이다
아래에서 위로본 모습
위에서 아래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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