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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국립공원에는/가야산에 폐사지는

가야산 폐사지.伽倻山 廢寺址.(일요암지.법수사지.용기사지.백운리사지)

by 애지리 2016. 1. 13.

가야산에는 법수사가 창건(802년) 되면서 여기에 따른 부속 암자 터가

일요암(日曜庵).백운암(白雲庵).도은암(道恩庵).보현암(普賢庵).미타암(彌陀庵)과

법수사지. 용기사지가 있으며 도은암에 대한 기록은 성산지(星山誌)에 나오고

미타암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다고 한다.(상생의땅 가야산. 깊은솔 발행)

 

 

 

 

 

일요암지(日曜庵址)

  일요암은 고려 말 송천우가 창건 하였다고 하며 가야산에 있다는거 외에는

  별 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현재 4단의 석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건물지로 추정되는 주초석의 흔적은 찿을수 없으며

  그 자리에는 현재 육정신장(六丁神將)으로 불리는 민간신앙의 흔적이 남아있다..

* 이곳은 입산이 금지된 지역으로 국립공원 직원의 현지 안내와 해설을 도움 받아

  답사를 할수 있었다.

  세워진 육각형의 돌에는 정축(丁丑).정해(丁亥).정유(丁酉).정미(丁未).정사(丁巳).정인(丁寅)

  신장(神將)이라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 암자의 터는 동서로 34.2m. 남북으로 20m 로 돌 기둥은 60cm.한 변의 길이는 30cm. 높이는 1.2m

 

 

법수사지 삼층석탑 

법수사지가 있는 중기마을 전경(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법수사지(法水寺址)

법수사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법수해인사 란 문구를 근거로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 되었다고 추정하며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작은아들 범공(梵空)이 스님이 되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성주읍지(星州邑誌)인 경산지 불우조(京山誌 佛宇條)에

사찰의 전성기에는 구금당(九金堂).팔종각(八鐘閣)등 1,000 여칸이 넘는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 되어 있으며

 지금 곳곳에 석탑.당간지주.주춧돌 등이 산재 되어 있다.

 

등법수사남루(登法水寺南樓)

예전에 한 번 오른 적이 있고. 오늘 다행히 거듭 오른다.

두 손 마주 잡고 읍을 함은 기이한 경관이 모여 있기 때문이요.

쉬이 떠나지 못하고 주저함은 . 고의(古意)가 깊기 때문이네.

시냇물은 돌 절벽에 놀라고. 빗(雨) 기운은 먼 멧부리에서 나온다.

뜻이 통하는 스님 친구가 있어서. 근심이 있을때.

더불어 시를 읊조릴 만하네.

이 시는 "법수사 남루에 올라" 란 시로 성주 출신 조선초의 문신인 형재(亨齋) 이직(李稷)의 시

 

 

 

 

 

 

용기사지(龍起寺址)

용기사지는 신라 시대의 거찰인 금당사(金糖寺)의 암자로서 해인사와 비슷한 시기(802)에

현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속칭 중기마을 일대에 건립. 무려 1000 여칸이 넘는 건물과 100 여개의

암자가 있었던 성주 지방의 불교 진원지이며 훗날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막내아들 범공(梵空)이

중이 되어 해인사를 드나 들면서 여생을 보내기도 했던 곳이다.

금당사는 고려 중엽부터 법수사로 고쳐 부르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 중엽에 폐사되어

지금의 마을이 형성 되었으며 법수사에 안치 되었던 불상은 법수사폐사될때

이곳 용기사로 옮겨지고 용기사 마저 폐사되자 1897년(고종광무1)에 당시 해인사 주지

범운선사(梵雲禪師)에 의해 해인사 대적광전의 주존불로 안치 되었다.

이 불상은 비로나자불 로서 은행나무로 만든 높이 2.35m(高七尺七寸五分周十六尺六寸)의

좌불인데 고려시대에 만들어 진것이다.

이 절터앞 동남쪽으로 백운대 서남쪽으로 상아덤과 만물상 위편 북쪽 으로는 가야산 정상의

기암 절경이 둘러쌓인 대명당 터로서 가뭄시에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을 본다고 한다.

현재 절터앞의 용각대(龍角臺)라는 봉두(峰頭)에는 용의귀(龍耳)라고 하는 한 쌍의 돌과

절터에는 길이 20m 높이 2m 정도되는 2단의 석축을 쌓아 만들어졌던 흔적이 남아 있고

동쪽 계곡에 높이 20m의 용기폭포가 있다.(자료: 성주 마을지)

* 매표소에서 용기사지 까지는 2.1km

  현재 이 구간은 휴식년제로 입산이 금지 되어 있슴 

 

백운리사지(白雲里寺址)

문헌 기록의 부재로 사명(寺名)및 창건및 폐사에 대한 기록은

확인 되지 않으며 그러나 확인되는 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서

조선후기 까지 운영되었던 사찰로 추정된다.

특히 가야산성 중심부에 위치하고 용기사지와 불과 100m 이격되어있어 

용기사지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가야산국립공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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