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227호 종묘를 가다.
지난 5월1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1995.12.9 등재) 이며 대한민국무형유산으로 등록된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소재한 종묘(宗廟)를 찿아 우리의 역사를 알아본다.
종묘의 정문인 창엽문을 들어 가기전 종묘어정(宗廟御井)과 하마비(下馬碑).
그리고 이상재선생 동상을 둘러본다
* 종묘란 조선왕조 역대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사당으로
상대적으로 경복궁이나 창덕궁 등 궁궐보다 사람들의 발길이 덜 붐비는 곳이라
문화관광의 분위기보다 엄숙함이 더 할것같은 종묘. 먼저 도로변에 세계유산 종묘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 하마비는 왕이나 장군.고관 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앞에 세워 놓기도 하는데
유명 사찰앞에도 하마비가 세워져 있음을 종종 볼수있다.
* 하마비의 시작은 1413년(태종13) 2월에 처음으로 예조에서 건의하여 왕의 허가를 받아
나무로 만들어 표목(標木) 을 세웠다고 한다.
비석엔 大小人員 下馬碑 (대소인원 하마비) 이라 음각되어 있으며 이곳 종묘의
히마비는 우리나라 하마비중 크기가 제일 큰편에 속한다고 한다. 지금의 하마비는
1663년(현종4) 10월에 비석으로 비신은 높이132cm. 너비58cm. 두께20cm.
종묘 외대문 (창엽문)
* 종묘광장은 면적이 39.669평방미터(12.000평)정도로 서울 시민의 좋은 휴식처가 되어주고 있으며
광장을 걸어 들어가면 보통 외대문 또는 외삼문으로 불리어지는 종묘의 정문인 창엽문(蒼葉門) 이 보이며
문을 들어가야 종묘를 볼수있는데 입장료를 지불해야 들어 갈수있다.
* 창엽문(蒼葉門)이란 푸른 나뭇잎처럼 우거져 세세손손 번성 하라는 뜻를 담고있는데
그당시 정도전이 지었다는 설과 무학대사가 작명 하였다는 설이 있다고한다.
창엽을 한자로 풀이하면 蒼자를 破字하면 十.十.八.君 으로 合하면 28임금이 되며
(현재 종묘의 위패는 모두 28위(位)가 모셔져 있음)
葉자를 破字하면 十.十.世.木 으로 合하면 20代
(조선왕조 왕계도는 대수가 20대(代))
그리고 한자 획수로는 창(蒼)자가 14획. 엽(葉)자가 13획으로 合이 27획
(조선왕조 임금은 마지막 순종까지 27대까지만 이어졌음)
* 조선의 패망(敗亡)시기를 예측한 작명 이었을까? 우연의 일치였으까?
눈에 보이지않는 세상이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 훨씬 깊음을 담고 있으며
작명의 심오함을 느끼게 한다.
이 종묘어정(宗廟御井)은 하마비를 조금 지나면 오른쪽 방향에 위치하며
왕이 종묘에 왕래할때 이물을 마셨다고하여 어정이라 불리어 졌다고한다.
조선초기에 조성되었으며 소유는 국가. 현재 서울 4대문 안에 남아있는 우물로는
유일 하다고 한다. 깊이는 8m 지름은 1.5m.
* 우물 옆에는 돌로만든 석상이 놓여있다.
월남(月南) 이 상재(李 商在) 동상
* 종묘의 정문 창엽문을 들어 가기전 왼편에 우뚝 서있는 동상이 보여 다가가보니
한복 차림의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이 서있다.
순간적으로 조금은 의아한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 종묘 입구에 독립운동가의 동상이라.
일부로 발품을 조금 팔아야 알수있는 위치라 거의 대부분의 관람객은 그냥 종묘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지난 8월에 충남 서천. 한산면 종지리의 이상재 선생 생가지를 다녀왔는데
동상이 이곳에 있을줄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
일부 뜻있고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합당한 위치에 옮겨야 된다는 건의와 주문이
가끔 인터넷에 오르내린다.
* 월남 이상재 선생은 고려말 충신 목은 이색 선생의 16대 손으로 태어나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립을 주도한 분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져있는 분으로
1986년 시민광장을 마련하면서 동상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비슷한 사례로 창덕궁 비원 정문앞 충정공 민영환 선생 동상을 다른곳으로 옮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