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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량의 곡식의 량을 측정할때 사용된 도구로 보통 경상도 지방에선 됫박이라 불리어 졌는데 한되를 열번하면 한말(斗)이 되는데 5홉 짜리는 한되의 반이 되는양으로 그렇게 자주 쓰이지는 않은 걸로 기억됩니다. 윗부분 까지 소복이 담으면 고봉으로 담았다고 불리어 통용 되었는데 아직도 이 도구들은 간혹 사용 되고 있습니다. 2011. 2. 27.
소주 되병 생활도구가 많이 부족 했던때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 되어지던 소주 1.8 리터짜리 소주 되병 입니다. 이시절엔 아마 소주가 지역제로 판매가 되어지던 시절이라 기억이 되네요. 지금은 생산이 되지않고 그이후 프라스틱 용기로 바꿔 생산 공급되다 지금도 생산이 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당시 시골에서는 주로 석유를 담아 호롱 등 이나 호야등에 불을 켜기위해 기름 집에서 석유사오는 도구로 사용 되었고 또는 막걸리 병으로 쓰여졌고 내년농사 지을 종자를 담아 보관하던 저장용 용기로도 애용 되었는데 주로 잡곡류를 종류별로 담아 벽장이나 창고에 놓아두면 가장 좋은점은 쥐 들한테는 그림의 떡일 뿐 었지요. 아래 사진에는 금복주라는 글씨와 회사 로고인 두꺼비가 보입니다. 2011. 2. 26.
애지리농원 등산로 애지리농원과 접해있는 매적산(350m)능선을 따라 약 2km 길이의 등산로를 드디어 개통 시키어 어제는 처가집 식구들과 개통된 등산로 를 가벼운 마음으로 약 1시간정도 걸려 송림으로 우거진 숲속에서 솔향 실컷 마셔 봤습니다. 사실은 등산로를 만들면서 다 완성되면 매일 하루에 한번은 산에 오르리라 마음 먹었는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답니다. 농원 곁에 이런 소나무로 우거진 산이 있다는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요! 2011. 2. 23.
겨울잠에 빠진 고사리 애지리농원 고사리 밭 고사리의 겨울 모습입니다. 말라버린 고사리 줄기는 작년에 올라왔던 고사리 줄기와 잎인데 곧 묵은 지난 줄기 사이에서 아기손 같은 고사리가 고개를 살며시 내밀것입니다. 부드럽고 연한 부위만 꺽어 쪄서 햇볕에 말리면 우리들 밥상에 차려지는 고사리 나물 반찬이 된답니다. 올해는 아주 많은 양은 아니지만 수확이 좀 될거 같은데 애지리 카페나 불로그를 통해 판매를 할 생각 입니다. 아직 생산도 하지 않았는데 미리 주문 하신분도 있네요. 2011. 2. 23.
법수사지 당간지주(法水寺址 幢竿支柱)성주.수륜 당간지주가 있는 중기마을 부락 이 지주는 당간(幢竿)을 달아 세우는 대(臺)로서 큰 절의 표지(標識)가 되고 괘불(掛佛)도 하고 관등시(觀燈時)에 여러 줄을 매고 등을 달기도 하여 마을 주민들은 괘불 또는 불기대 라 부른다.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 진 곳으로 법수사지의 축대로부터 약100m가량 떨어진 백운리 중기 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3.7m로 장방형의 지주 두개가 동서로 마주보고 서있고 지주의 안쪽 면에는 아무런 장식없이 깍아 다듬어 올라가다가 상부에 대를 끼울수있는 홈을 마련 하였다. 두 지주 사이에는 당간을 바치는 간내석(杆奈石)을 삽입하고 간내석에는 둥근 구멍을 뚧었다. * 법수사지 당간지주는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316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북 유형 문화재 제87호로.. 2011. 2. 21.
중기 느티나무(성주.수륜) 성주.수륜면.백운리1196번지.중기(中基)마을 뒷편 용기골 입구에있는 노목으로 높이 14m 둘레 2.8m 뻗은 가지는 동.서.남.북.각각 12m 로 수령은 약 200년 정도로 1580년(선조13년) 경에 법수사(法水寺)에서 심은 것으로 추측하고있다. 큰 바위 사이에서 자랐으며 바위에는 벽운대(霹雲臺)라 새겨져 있는데 바위사이에서 자라서 그런지 수령에 비해 나무가 작은 편이다. 이 벽운대에서 1954년 원근의 많은 사람들이 유암 김 인식(由菴 金 仁植)을 위하여 수계(修契)하고 단(檀)을 쌓아 "벽운대"라 하였으며 대 위의 느티나무를 운수정(雲樹亭)이라 이름지어 매년 입하에 탐승(探勝)의 심정(心情)으로 회유(會遊)하니 "입하계"(立夏契)라 한다. 그리고 이 중기(中基)마을은 신라 애장왕(哀壯王)3년(80.. 2011. 2. 21.
성주 향교 (星州鄕校) 성주.예산2리 성주읍 예산리 교촌(校村)마을 동쪽 산 밑에 자리잡고 있으며 1397년(태조6년) 서울에 성균관(成均館)서 지방에 향교를 세울때에 성주향교를 세웠는데 대성전(大成殿),동.서무(東.西무),명륜당(明倫堂), 입덕문(入德門),수복사(守僕舍),고사(庫舍),건물이 있고 만화루(萬化樓),양사재(養士齋)는 임진왜란 때 타버리고 동.서재(東.西齋)는 6 .25 때 타버렸다고 합니다. 대성전에는 처음 중국 곡부(曲阜)에서 전해진 공자(孔子)의 화상(畵像)과 그밖에 중국의 사성(四聖).십철(十哲).송나라의 육현(六賢)의위패를 모셨으나 목사 강중진(康仲珍)이 공자의 화상을 나중에 위패로 바꾸었고 동.서무에는 우리나라의 18현(賢)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위패가 오래되어 낡아서 1980년 모두갈고 새로 썼으며 명륜당은 유생들이.. 2011. 2. 21.
동방사지 칠층석탑(東方寺址 七層石塔) 성주.예산 성주읍.예산리.269-10 번지에 소재한 동방사지 7 층 석탑은 신라 40대 애장왕 때에 건립된 동방사 내 석탑으로 탑의 양식은 고려시대 것 이며 당초는 9층 석탑 이었으나 현재는 7층만 남아있다.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반이 물러져 5 도 정도 탑이 기우러져 있는데 기단부는 메몰 되었으며 탑신의 규모가 크고 남쪽으로 향하여 있다. 2층 탑시 까지는 양측 우주와 중앙부 탱주가 있으며 3층 탑신 부터는 우주만 있고 1층.2층.3층 옥개석 4귀에는 연꽃무늬가 조각 되어 있는것이 특색이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전체를 축조 한것이 동방사의 유물로 전해지고 있다하며 불교 전성 시기인 통일 신라후기에 건립 하였다고 한다. 탑은 이천(伊川)에서 불과 5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920년 경신년 대홍수에 흐름.. 2011. 2. 20.
옹기 약탕기 한약재료를 넣고 불에 달여 아픈 환자가 복용 하거나 때로는 몸에 좋은 보약을 달이는 데도 쓰여 졌지요. 지금은 전기 약탕기가 나와 온도 조절도 자동인데 옹기 약탕기는 주로 숯불에 달이는데 불을 조절 하는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근래에 와서 대체의학 이니 자연의학 이니 동양적인 치유방법이 재인식되어 지면서 재래 약탕기에 의한 약제 조제법도 다시금 부각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2011. 2. 20.
말(斗) 곡식의 양을 측정할때 사용되던 도구로 아직도 시골 장터 에서 할머님 들이 간혹 되 나 말 로 쌀이나 콩 등을 팔고 사는 모습을 볼수도 있습니다. 모든 단위가 미터법 으로 바뀌면서 부피는 리터로 무게는 그람으로 표시를 하고부터 어느날부터 우리들 주변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옛 속담에 "되로주고 말로 받는다"라고 그러는데 먼훗날 되가뭔지 말이뭔지 모르는 시대가 올지도... 말 은 많다는 것 을 의미 하기도 하지요. 주량이 많은 사람에게 "말술을 마신다"고도 하는데 사람이 보편적으로 담아서 들수있는 양의 도구로는 말이 가장 큰 도구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2011. 2. 20.
오현재(梧峴齋)와 이장경(李長庚) 묘소(성주.대가) 농서군공 이장경은 고려 고종에서 충렬왕때 사람으로 본관은 성주(星州) 순유(純由)의 후손 .득희(得禧)의 아들로 슬하에 다섯아들 백년(百年).천년(千年).만년(萬年).억년(億年).조년(兆年)을 두었으며 모두과 문과에 급제 하였으며 고려 충렬왕(忠烈王)때 삼중대광(三重大匡).좌시중(左侍中).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 상호군(上護軍).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을 봉하고 손자 승경(承慶)이 원나라의 벼슬을 하여 원나라 황제가 농서군공 으로 특봉 하였다. 원래 성주이씨 중시조(中始祖)인 이장경 묘소는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 8번지 선석산 비호석봉(非乎石峯)에 있었으나 조선조 세종 25년 (1443년) 왕명으로 이장(1455~1456)하여 현재 위치인 성주군.대가면... 2011. 2. 18.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 성주읍 성주읍.경산리.295ㅡ1번지 서문고개에 있는데 임진왜란 때 영남지방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성주 목사가 되었다가 성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제 말(諸沫) 장군과 진주성 싸움을 돕기위하여 출전하다 전사한 조카 제홍록(諸弘綠)의 업적을 세긴 비로 1792년(정조16년) 당초에 성주국민학교 앞 길가에 세워 졌는데 도로 확장 공사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고한다. 비는 높이가 2.16m 너비 79cm 두께 37cm 비신(碑身)에는 이조판서 서유린(徐有隣)이 글을 짓고 제학 이 병모(李秉模)가 글씨를 썼으며 성주목사를 지냈던 조 윤형(曺允亨)이 전서(篆書)를 썼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성주 서문고개에 성주여자 중고등학교 정문 맞은편에있다. 경상북도 지정 문화재 제61호 (1974년 12월 .. 2011. 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