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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유적지를 찿아(불교)

예천 용문사(醴泉 龍門寺)경북.예천

by 애지리 2016. 1. 27.

 

요약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용문산(龍門山)에 있는 절.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김룡사본말사지(金龍寺本末寺誌)』에 의하면, 870년(경문왕 10)에 두운(杜雲)이 절을 창건하여 용문사라 하였다고 한다.

두운이 이 산의 동구에 이르렀을 때 바위 위에서 용이 영접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절을 짓기 시작했을 때 나무둥치 사이에서 무게 16냥의 은병(銀甁) 하나를 캐어 그것으로 공사비에 충당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태조는 후삼국을 정벌하던 중에 이 절에 군사를 거느리고 머문 적이 있었는데, 두운의 옛일을 생각하고 뒷날 천하를 평정하면 이곳에 큰 절을 일으키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그 뒤 태조는 936년(태조 19) 칙명으로 이 절을 중건하였고, 매년 150석의 쌀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983년(성종 2)에는 청석(靑石)으로 구층탑을 세웠다. 이 후 이 절에는 두운의 법맥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영련(英縺)은 이곳에서 30년 동안 수도하다가 조응(祖膺)에게 법(法)을 전하였다.

조응은 이 절이 퇴락해 감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1165년(의종 19) 제자 자엄(資嚴)과 함께 여러 법당과 승방 등을 건립하였다. 1166년에는 의종의 칙명으로 중수를 시작하였고, 1171년(명종 1) 태자의 태(胎)를 보관한 뒤 절이름을 창기사(昌期寺)로 바꾸고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열었다.

낮에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을 읽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염(念)하는 의식을 항규(恒規)로 삼았다. 1179년 중건이 마무리되자 용문사에서는 선문구산의 승려 500명을 모아 50일 담선회(談禪會)를 열었다. 그때 단속사(斷俗寺)의 선승(禪僧) 효순(孝惇)은 『전등록(傳燈錄)』·『능엄경(楞嚴經)』·『인악집(仁岳集)』·『설두집(雪竇集)』·『염송(拈頌)』 등을 강하도록 하였다.

그 전 1173년 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3만 승재(僧齋)를 열고 대법회를 개설하였다.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 영치(穎緇)가 강을 맡았는데, 이 법회는 1180년에 시작하여 1182년까지 계속되었다. 1478년(성종 9)소헌왕비(昭憲王妃)의 태실(胎室)을 봉안하고 다시 절이름을 성불산 용문사로 고쳤다.

1608년(광해군 41)에는 혜명(慧明)이 제하당(霽霞堂)을 중수했고, 1636년(인조 14)에 학문(學文)이 적묵당(寂墨堂)을, 그리고 1637년에는 두인(杜印)이 그 남쪽에 범종루를 지었다. 당시 그 밖에도 광명전(光明殿)이 세워졌다. 그뒤 1783년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태실을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로 이름을 고쳤다. 1835년(헌종 1)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린 것을 열파(悅坡)·상민(尙敏)·부열(富悅) 등 여러 승려들이 힘을 합쳐 1840년대에 공사를 끝마쳤다.

이 절에는 세 가지 이적(異蹟)이 있었는데, 첫째는 두운이 창건할 때 용이 영접한 것이고, 둘째는 은병을 캐어 절의 공사비에 충당한 일이며, 셋째는 절의 남쪽에 9층 청석탑(靑石塔)을 세우고 사리(舍利)를 봉안하는데 4층탑 위로 오색구름이 탑 둘레를 돈 일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145호로 지정된 대장전(大藏殿)을 비롯하여 보광명전(普光明殿)·응향각(凝香閣)·진영각(眞影閣)·명부전(冥府殿)·응진전(應眞殿)·회전문(廻轉門)·범종루·강원·천불전(千佛殿)·두운암(杜雲庵)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684호인 윤장대(輪藏臺)와 보물 제729호인 용문사교지, 보물 제989호로 지정된 1663년(현종 4)에 목각한 후불탱화(後佛幀畵) 등이 있다.(한국문학 대백과사전에서)

 

 성보박물관

 보광명전(普光明殿)

 

 영남제일선원

 

 

 천불전(千佛殿)

 

 

 

 

 응진전(應眞殿)

 

 

 명부전(冥府殿)

 

 

 

 

진영당(眞影堂)

대장전과 명부전 사이에 자리한 진영당은 과거 용문사에 주석 했던 선사들의 진영을 봉안하는 곳이다. 현재 이전각에 <진영당眞影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지만 본래 기능을 상실하고 사찰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편액 외에 건물 전면 고주에는 일제강점기에 작성한 진영당에 관한 현판이 있다. 이 현판 기록에 따르면이 전각은 조사전(祖師殿)인 동시에 시왕전의 노전이었다.
 
1681년에 희인(希仁)대사가 신암자(新庵子)를 이건한 뒤 1893년에
 

 

 

 

혜옹강백이 중수하고 1934년에 주지 이광하(李晃夏)가 중수한 후 이 어 1935년 다시 중수하였다.

 이 외에 진영당으로 추정되는 건물로「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적힌 1649~1670년에

 건립된 삽삼전이 있다. 삽삼은 삼십삼명의 조사, 즉 조사전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삽삼전을 지은

행변과 신암자를 이건한 희인이 일치하지 않고 조성시기도 맞지 않는다. 용도가 비슷한 건물이

 한사찰 안에 여러 채가 있었는지는 좀더 검토가 필요하다.

진영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건물로 향 우측 전면 2칸은 통칸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향 좌측의 전면 4칸은 앞쪽에 툇마루를 두고 있는 홑처마 납도리 집이다. 현재의 평면으로

 추정해 보면, 후면의 퇴칸은 감(龕)이었을 것이며, 그 앞의 실(室)과 툇마루는 예를 올렸던

 사당형 공간이었을 것이다. 현재 건물에서 보이는 선자연(扇子椽)구성수법은 조선중기까지

 지속적으로 쓰이던 수법으로, 1681년에 지어진 후 큰 변화 없이

오늘날까지 유지되었다고 생각된다(용문사 자료에서)

 대장전 목불좌상및 목각탱(大藏殿 木佛坐像및木刻撑)보물 989호

 용문사 윤장대(龍門寺 輪藏臺)보물 684호

*강화도 정족산 삼랑성 전등사에도 이곳 용문사 윤장대를 재현 시켜놓은 윤장대가

있으며 불교 에서는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쌓인다고 합니다.

* 윤장대 란 -팔각형으로 된 책장에 밑에는 바퀴를 달고 중앙에는 기둥을 세워

                    궤를 돌리면 찿고 싶은 책을 쉽게 찿아 볼수 있도록 만든 책궤(어학사전에서)

 

 

 

 대장전(大藏殿)보물145호

* 대장전은 보물 145호로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국보 243호로 관리되다 1963년

조사에서 조선시대 건물로 추정 보물 145호로 강등되어 1980년에 보물 684호로 지정 되었는데

연구용역결과 대장전과 윤장대는 조선 헌종 때인 1670년등 여러차례 보수 되면서 상당부분 조선시대

양식을 띄고 있지만 건립 초창기 원형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어지난달(2015.12)경북 예천군이

용문사 대장전과 윤장대의 고증작업을 거쳐 국보 승격을 다시 경북도에 신청을 해 놓았다고 합니다(

이 대장전과 윤장대는 고려중기 일체형 구조로 건립 됐다는 중수 기록을 확인.

중국의 969년 융흥사.전륜장전 일본의 1408년 안국사.경장도 국보로 지정된 사례도 있어

대장전과 윤장대 2기를 한데 묶어 국보지정 신청을 하게 되었다.(2015년 12월 14일 경향신문 참조)

 

 

 

 

 

 

 범종각(梵鐘閣)

 

 자운루(慈雲樓)경북문화재자료 제1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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