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깨 타작은 아직 탈곡기가 개발되지 않아 많은량은 도리깨에 의존하여
타작을 할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금년에는 들깨 개화기의 잦은 비로 결실에 영향을 끼쳐 소출이 아주 저조하다고
일찍 들깨를 수확한 농가의 푸념이다.
재래식 농기구인 도리깨는 어학사전에는 "곡식의 낟알을 떠는데 쓰이는 재래식 농기구"라
표기되어 있는데 수확 도구의 일종인 도리깨의 기능은 기계식은 아니지만
사용할 때마다 아주 기발하고 지혜롭게 만든 도구라는 생각을 해본다.
2019. 10. 22.
도리깨가 언제부터 농가에 이용 되었는지는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15세기 편찬된
최초농서 농사직설(農事直設)의 기록에는 "만약 습지가 깊어서 사람이나 소가 빠질 지경이면
도리편(都里鞭)으로 풀을 죽이고 씨를 뿌린다"라고 해서 여기서 도리편은 도리깨를
이르는 말이라 추정 한다고 한다.
* 농사직설(農事直設)은- 조선전기.문신 정초.변호문 등이 왕명에 의하여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농법으로 1429년에 간행한 농업서로 1429(세종11)년에 관찬(官撰)한 서적이다.
관찬(官撰) 이란 정부에서 펀찬한 책을 말한다.
* 1798년 간행된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이 지은 과농소초(課農小抄) 에
"고려시대 학자 이색이 중국 원나라에 가서 도리깨를 연상 하면서 시를 지었다고" 기록
되어 있는데 1900년대 기계식 탈곡기가 나오며 사용이 많이 줄어 들었지만
아직도 적은양의 곡식을 떨때나 기계화가 되지않은 잡곡류 수확에 도리깨의 역활은 중요하다.
도리깨로는 한 사람이 하루 콩8두.보리14두.의 알곡을 타작할 수 있다고 한다.
* 과농소초(課農小抄) 농업서는 - 1798년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우리나라 농학과 중국의
농학을 비교.연구하여 편찬한 농업서로 1798(정조22)년 농업상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 하기위하여 윤음(綸音)을 내렸다고한다.
이때 토지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법(限田法)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농업개혁론이 대두 되었다.
* 연암 박지원은 진보적인지식인.조선후기 북학의 대표적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문명비평서인 "열하일기"의 저자로
과농소초 부록"한민명전의" 에서 당시 토지제도의 개혁안을 제시 하기도 하였다.
도리깨
* 옛날에는 도리깨를 주로 대나무와 물푸레나무 가지를 활용 하였으며
도리깨는 자루(장부).렬(치마).비녀(꼭지).아들 등으로 구성되어 장부는 손잡이 이며
비녀는 장부와 아들 연결부분.아들은 꼭지끝에 나뭇가지를 말하며 치마는 여러가닥
아들을 묶어놓은 끈을 말한다.
보통 장부(손잡이)의 길이는 3m 내외가 적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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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곡을 털어낸 들깨대 보통 1묶음에 1kg 정도의 들깨 알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