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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국립공원에는/가야산에 암자는

해인사 암자.지족암.(知足庵)

by 애지리 2016. 1. 23.

이곳 지족암은 백련암 방향으로 올라 가다보면 왼편에

지족암 표지판이 보이는데 표지판 방향으로 계속 올라가면 지족암이 나옵니다. 

지족암 표지판 지족암 연혁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습니다.

 

지족암의 옛 이름은 도솔암이며 "지족" 이라는 말은 산크리스트어

Tusita 의 음역으로 그 의미는 미륵보살의 정토 "만족시키다" 는 뜻으로 지족도솔천

이라고 합니다.

지족암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인 희랑조사가 기도하던 토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이후 한동안 본 암자가 어떻게 유지 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으나 16세기에 쓰여진 "한강집"(寒岡集)의

유가야산록과 도세순의 용사일기(龍蛇日記) 17세기 창주문집의 유가야산기 등

유학자들의 문집속에 지족암을 가보았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 하므로 1796년 관수(官守)스님의

중건 이전에도 사세(寺說)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1850년에 추담장노가 주석하다 큰절로 내려간후 폐허가 되기도 하였으나 1856년에 박문환공(朴文煥公)이

중건 하였고 1893년에 환운대덕(幻雲大德)이 증수 하였습니다.그리고 박문환공의 아들인 기돈거사가

선친을 추모 하기위해 뜻을 모아 향계를 결성하여 법당에 향과 등 공양이 끊이지 않게 지원 하였습니다.

1913년에는 큰 홍수로인해 당우(堂宇)가 도괴되어 몇년간 빈터가 되었으나

고산 혜명 스님이 1915년에 암자를 복원 하였습니다.

그 이후 1940년 홍송해 스님. 1958년 영월스님.1963년 정림스님. 등이 지족암에 주석 하였습니다.

1976년부터 해인총림 율주 동곡당 일타 대종사가 지족암에 주석 하면서 법당을 신축하고

요사채를 크게 증수 하였으며 도량을 대폭 확장 암자의 면모를 일신 시켰습니다.

1999년에 감원으로 취임한 향적종사는 스승의 대를 이어 2010~2013년에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하였습니다.이때에 진영각.석정당.삼여정(공양실).조실채.산신각 등을 신축 하였으며

해인삼매탑과 동곡교를 건립 하였습니다.

 

 

 

 

 

 

 

 

 

 

 

 

 

지족암 뒷편 산 바위에 양각으로 조각된 불족도(佛足圖)

석가모니의 발자국을 형상화한 그림.

우리나라에서도 불족도가 처음에는 사성(寫成)되어 신앙되었다고 짐작되나 현존하는 것은 대부분 목판본이며, 드물게는 목판의 판목이 전해지기도 한다. 즉, 불족도 신앙의 유행과 함께 그 수요에 따라 판각되어 널리 유행되었으며, 현존하는 것은 중국 남송의 소흥(紹興) 30년(1160) 연경사(延慶寺)의 입석(立石)에 새겼던 것에 대한 목판 복각본이 알려져 있다.

국내의 모각은 전북대학교 박물관(1812), 서울 삼성동 봉은사 및 양산 통도사 박물관 소장본이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봉은사의 목판은 1857년(철종 8) 복각으로 그 상태나 체제가 가장 좋은 편이다.

목판의 크기는 전체길이 65㎝, 너비 36㎝로서 위에는 ‘석가여래유적도(釋迦如來遺跡圖)’라 하였으며, 그 아래 길이 50㎝, 폭 34㎝의 쌍족(雙足)을 양각하였다. 그림 아래에는 다시 불족도의 유래를 적고 있다. 그림은 평면 위주로 처리되었으며, 그 내용은 대체로 화문(華紋)·만자(卍字)·어형(魚形)·보검(寶劍)의 형상 등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목판의 경우 불족도의 이면에는 108염주도(念珠圖)를 새기고 있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는데, 이 역시 낱낱 염주에 불·보살·천왕(天王)·금강신 및 각종 지옥의 명칭을 열거하고 있어 당시 염주신앙의 형태를 아울러 짐작하게 한다.(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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